아사미는 유부남 남자친구와 헤어지게 된 자초지종을 말했다. 남자 친구에게 이메일로 헤어지자고 통보받았다고 한다. 한국이 문자를 주로 주고받는 반면 일본에선 연인끼리도 이메일로 의사소통하는 게 일반적인 것 같았는데 오사카에 가서 데이트할 준비로 바빴던 그녀에게 일본 땅에 도착할 쯤에 이메일로 이별통보를 했단다. 아내가 아사미의 존재를 알아냈다면서...... 남자와 아내 사이엔 아이가 있었나 보다. 남자가 아사미를 보러 두바이에 놀러 왔을 당시 샀던 두바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스카프를 맨 낙타 인형을 아이에게 선물했단다. 남자가 기장으로 있는 J항공사는 두바이에 취항하지 않았고 평소에 의심을 했었는지 아내가 캐물었나 보다. 그렇게 2년여간 뜨거웠던,
아사미가 사랑이라고 하던 연애는 끝이 났다. 헤어진 다음날부터 파티며 온갖 모임에 바쁘던 아사미는 먹는 것도 대충 먹으며 말수가 줄었었다. 비행에 적응하느라 바쁘기도 했지만 아사미는 이후로 그 남자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았다. 주변에 있던 승무원들 중엔 이별의 아픔을 위로해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잘 됐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적지 않은 상심이었음은 분명하지만 나 역시도 비싼 대가만큼 큰 훈계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사미는 두바이를 떠나기까지 몇 번 더 쓴 눈물을 내야 했다.
아사미는 자기는 영영 두바이에 있을 것도 아니고 연애나 결혼도 일본 사람이랑 할 거라면서 비행한 지 얼마 안돼서부터 일본으로 다른 항공사나 일본 회사 면접을 보러 다녔다. 그러려면 휴가나 오프를 면접 날짜에 맞추기 위해서 휴가 앞뒤로 긴 비행을 바짝 당겨해야 했다. 일본행 비행기에서 쪽잠을 자가며 오가던 어느 날 자기가 잠든 줄도 모르고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웬 남자 어깨 위에서 자고 있었더란다. 아사미가 당황하며 깨서 미안하다고 약 7번 말하자, (아사미는 약속 시간에 자기가 일찍 와도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남자가 싱긋 웃으면서 어깨 위 자기 머리를 두 손으로 받치는 시늉을 하며 잘 잤냐고 했단다. 이야기를 여기까지만 들었을 때 이미 나는 아사미가 이 포인트에서 사랑에 빠졌음을 예감했다. 내 직감을 따라서 잘 생겼더냐고 묻자 아사미는 외모의 우월성보단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는 듯 대답 대신 이야길 이어나갔다. 아사미는 이미 항공사 경력이 n 년에다가 다국적 동료들 승객들로 인해 국적 때려 맞추기 짬밥이 꽤 됐지만 그 남자의 국적이 애매해 보였다고 한다. 아랍 베이스에 아시아인의 라인이 있는데 영어는 유창한 미국 영어를 쓴다고 했다. 원래도 솔직한 편이고 궁금한 건 아끼지 않는 성격이지만 아사미는 이 훌륭한 남자가 누군지 너무 궁금했던 것 같다. 초면이지만 곧장 면전에 대고 어디서 왔냐고 물을 만큼 대범해진 그녀는 이미 예전의 그 불륜남을 잊은 듯 보였다. 인도라고 했단다. 미국에서 의대를 졸업했고 일본엔 연수 차 다녀가는 길이라고도. 인도. 인도로 말할 것 같으면 에미레이츠가 하루 10편을 운행하며 이 외의 거의 모든 에미레이츠 비행기에서 인도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중동 회사지만 인도 승객 없인 승승장구하는 것이 불가해 보일만큼, 그만큼 에미레이츠 (이하 EK) 승무원들은 인도 승객들에 관한 희로애락을 함께 한한 전문가들이었다. 훗날 내 비행 인생을 돌아볼 때도 그들 없인 웃거나 화날 일도 없었다 싶었는데 문제는 아사미는 인도 국적 승객들과의 희로애락에서 '노'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당시 EK는 국제적으로 대도시만 운행하던 이층 비행기인 A380 만 타는 승무원들과 나머지 국제선과 짧은 노선들을 담당하던 보잉 승무원들로 나눠져 있었는데 나는 전자인 A380 승무원으로 비교적 뽀대 나는 비행 지를 다녔지만 아사미는 다달이 인도는 두 번 정도는 가야 했다. 인도 사람과 결혼한 거나 마찬가지로 살다 보니 특정 국적에 대해서 인이 박히고 분노하는 일도 많았다. 하필 그 남자가 인도 사람인 것이 아사미 마음을, 이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그 시점에 아프게 했더란다. 한눈에 반한(아사미의 주관적인 해석이었을지도)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았지만 4박 5일이 지나서 두바이에 돌아올 때까지 답장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모두는 지난 몇 달간 잘못된 선택으로 마음고생을 했던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연락하라고 부추겼다. 그리고 두어 달 사이 아사미는 폭주하는 열차처럼 연애를 하고 있었다. 진행이 빨라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인도로 남자 친구의 가족을 만나러 가겠다고 했다. 친인척의 결혼식이 있을 예정인데 초대받았다며 인도 승무원의 조언을 묻고 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겪은 인도 국적의 승무원들은 머리가 비상하고 성실하고 솔직했다. 아사미가 인도 남자를 만난 다고 하니 가감 없이 그들의 문화를 전했나 보다. 남자 친구의 엄마와 이모가 아사미가 입을 사리를 준비해뒀다고 하니 다들 펄쩍 뛰며 시집가게 생겼다고 놀려댔다나.... 만난 지 석 달이 안되어서 결혼 이야기를 듣자니 아사미는 긴장이 되고 떨려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남자 친구에게 결혼 이야기를 묻자 부정하진 않았다면서.... 아사미가 앙다문 빨간 입술을 하고 사리를 입고 인도인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상상 하자 웃음이 났다. 결국 아사미는 인도에 다녀왔고 얼마 안가 헤어졌다. 아사미는 EK 입사 전에는 인도를 일본에서 명상과 신비의 나라로 알고 있었고 입사 후엔 사람들에게 기가 질리긴 했으나 인도 남자 친구를 통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었다. 아사미 남자 친구 가족들은 예상대로 매너 좋고 따뜻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친척의 결혼식도 무척 성대했고 볼거리 즐길거리도 많았다고 한다. 다만 아사미는 사리를 입고 닭똥과 소들이 난입하는 도로를 가로질러 걸어간 이야기를 하면서 두 번 다시 그곳에 갈 수 없다며 현실을 자각했다고 한다. 이어서 아사미는 매우 진지하게 결혼식에 가져갔던 9cm 루부탱 스틸레토 힐과 샤넬 가방이 닭들에게 노출됐었다며 소독하고 싶다면서 아는 서비스업체 없냐고 했다. 우리한테 헤어진 이유를 설명하는 동안 나는 너무 웃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아사미는 자기가 먼저, 그것도 자국에 대한 좋지 않은 평가로 인해서 헤어지자고 해서 전 남자 친구에게 미안하다고 했으나 사실 별로 미안해 보이진 않았고 사실 그 모습이 친구로선 다행으로 느껴졌다. 아사미의 전적에 비해보더라도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이유로 헤어진 거다. 남자 친구였던 사람도 마음 크게 다치치 않고 인정하더라며....... 아사미가 멀쩡하게 남들 앞에서 손잡고 연애도 하고 가족들도 만나보는 열심을 내서 연애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남자 친구와 헤어진 게 아쉬운 건지 미안한 건지 모르겠지만 티슈로 눈물을 찍어내던 아사미는 쓰는 마스카라가 워터 프루브인데 기능을 제대로 못하는 것 같다면서 나더러 뭐 쓰냐고 물어봐서 나는 또 박장대소를 했다. 친구가 연애하고 헤어지면서 사람이 좋게 또는 안 좋게 실성하는 과정을 본 것 같았는데 결국엔 360도를 돌아서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것 같아서 기뻤다.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기쁨도 보람없이 무너뜨린 내 친구 아사미였으니.....
같이 사는 사람의 인격과 생활반경 안에 나를 들이기가 어려웠다. 이방인으로 마음 둘 곳 없이 살며 부엌을 같이 쓰는 사람이라도 내 편으로 두고싶은 욕심이 컸었다. 비슷한 나이와 금발머리와 브루넷과 동남아시아 동료들 사이에서 같은 옆동네 친구를 만난 양 반가웠던것도 사실이다. 친구와 동료이자 자매같은 묘한 관계 속에서 그녀의 연애관은 내겐 세상 환장할 내용이었고 아사미가 누굴 만났다고하면 침을 삼켜가며 긴장하기도 했다. 아사미는 당시의 알량한 내 연애 경력에 자신의 화려한 이력을 더해주었다. 가까이서 살을 맞대고 같이 울고 기뻐하면서 그녀 대신 억장이 무너지고 속앓이를 할 기회도, 후회하고 위로할 기회도 주었다. 매번 필요 이상으로 감정의 문턱을 성급하게 넘어가던 아사미는 내게 반면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어쩔수 없이 끌리는 대상에 대한 나름 깊이있는 성찰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럴만한 계기가, 아니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였지만 그녀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었던 나로선 그조차도 감사했다.
(아사미상의 사랑의 불시착 마지막편은 다음번에 다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