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육볶음; 서울의 맛
승무원은 어디가서 뭘 먹을까
서울 비행을 가서 호텔에 도착하면 딱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나는 고민없이 역삼동에 있던 호텔 뒷골목으로 가서 제육볶음을 먹었다. 지금은 아주 유명한 백**씨가 운영하는 고기집이 뒷골목에 있었다. 본가가 서울이 아니라서 아무리 국적이 한국인 나지만 서울도 외딴 도시나 마찬가지였다. 비행하며 쌓아올린 피로감을 유니폼과 함께 접어 던져두고 립스틱만 쓱 지운채 로비로 위풍당당하게 나선다. 나몰라라하고 혼자 가서 저녁을 먹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외국인 승무원 중에 같이 가고 싶은 승무원을 챙겨 같이 나갔다. 내 나라에서 같이 밥먹는 승무원을 선택하는 것, 선택받는 것은 가히 왕이 후궁을 선택하는 정도의 상황을 연출했다. 모국에 왔으니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텐데..., 하며 감히 같이 나가자고 조르지 못하는 외국인 동료들 가운데서 내가 같이 가자고 하면 반색하며 좋아하는 것을 나는 은근 즐겼다. 요새말로 '국뽕'을 시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호텔 뒷문으로 나서면 바로 편의점이 하나 있었는데 제육볶음을 먹을 그 식당까지는 무려 3개의 편의점이 더 있었다. 식당에 가는 길 또는 오는 길엔 편의점 투어를 시키며 거기서 이것 저것 사고싶어 안달하는 외국인 동료들의 모습에 감격했다. 다음날 호텔 조식 대신 늦잠을 선택한 동료들이 편의점에서 훌륭해보이는 도시락을 사려고 하면 그를 만류하고 근처의 김밥집이나 중국집에 데리고 가서 한국 밥값이 얼마나 저렴한지, 두바이의 맥주 한잔 값으로 얼마나 재료가 풍성하고 맛깔난 음식다운 음식을 살 수 있는지 한국인의 위상을 보여주며 어깨를 들썩이며 좋아했다. 동료들의 감격하는 눈빛보단 아마 내가 더 신이 났을 것이다. 저녁을 먹고나면 노래방이며 아*박스와 같은 문구 전문점에 데려가서 그날로 체류비를 다 쓰게 만들곤 했다. 이미 K-pop에 빠진 동료라면 그가 좋아하는 가수의 굿즈를 호텔 로비의 초고속 인터넷으로 보여주며 살래 말래를 재촉했다.
어떤 건강 기사에서 보니 몸이 피로하면 패스트푸드같이 달고 짜고 기름진 음식이 당긴다고 했다. 제육볶음. 그것은 나에게 잘 듣는 두통약과 같았다. 일하느라 끼니를 건너뛴 빈속에 게다가 공항에서 호텔까지 오는 한시간 넘는 버스 안에서도 입에서 단내나게 동료들의 서울 QnA, 대한민국에 관한 TMI강의를 하고 로비에서부터 또 누가 시키지도 않은 서울 투어를 시작했으니 나는 땡벌 중의 땡벌이었다. 나는 이제 지쳤어요, 제육볶음을 만나기 30초전 내 마음은 불판처럼 달아올랐다. 그리고 제육볶음이 나오면 누구를 위한 기도일지도 모를 감사기도를 흡사 랩처럼 읊고나서 젓가락을 경주마처럼 달렸다. 옆의 동료가 맛있다고 길게 말하거나 뭐가 필요한데 하고 누가 말을 걸어도 손바닥으로 제지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오로지 제육볶음과의 재회를 만끽하려 애썼다. 내가 왕관을 내려놓는 시늉을 하면서 나 지금 먹고 있어. 말 걸지마. 하고 궁서체의 말투로 (영어로!!) 메시지를 전달하면 동료들은 빵 터져서 네 전하 하고 농담을 받아쳤다. 매운 것을 못 먹는 동료일 경우 삼겹살이나 목살을 시켰고, 돼지고기 먹는대도 따라 나서는 무슬림 동료는 고기 안넣은 된장찌개를 시켜주면 된장인지 고기인지 모를 것이 나오면 처음 한두번은 놀란 척 "이거 뭐지?" 하고 묻지만 이내 밥을 비벼가며 맛있게도 잘먹었다. 동료들에겐 제육볶음을 시키면 쌈야채도 무료로 리필이 되고 고기를 주문하면 된장찌개나 계란찜이 서비스로 나오며 고기를 알맞게 익혀서 잘라주기도 하지만 팁은 안받는, 한국 식당이 무척 신기하고 자비롭게 여겨졌다. 다음 날 비행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와 같이 식사를 했던 동료들은 기장실까지 소문을 내곤 했다. 너 가봤어? 가봐야 해, 로 끝나는 제육볶음 경험자의 전갈. 고기 불판에 환기통이 바로 연결되서 눈 매울 일이 없는 신기한 것을 보고 스페인 동료는 두바이로 돌아가는 길에 환기통과 불판이 쏙 들어가는 그 식당 테이블을 사가서 스페인에 고기집 차리고 싶다며 나에게 어디 가면 살 수 있을지 알아봐달라고 했다.
역삼, 강남, 이태원, 북촌, 남산, 노량진, 인사동, 동대문... 동료들 덕분에 우리나라 역사와 관광지를 섭렵하게 된 나는 어딜가나 제육볶음을 한번은 먹었다. 동료들 가운데선 몇년이 지나고나서 그 맵고 칼칼한 맛의 쫄깃쫄깃한 고기 이름이 뭔지 물어오기도 한다. 그리고 그날 내가 데리고 간 편의점에서 산 매실맛 소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산 슬리퍼, 또 내가 예약해준 강남의 미용실에서 머리를 했는데 샴푸와 드라이까지 무료인데다가 디자이너 선생님의 엄청난 기술에 감동받은 이야기, 식당 아주머니에게 팁을 남겼다가 다시 쫓아나와 돈 두고 갔다고 했던 일화...까지 줄줄이 왼다. 그래, 나랑 나갔으면 한번은 맛봤을테지. 그 서울 맛의 이름은 제육볶음이야.
달고 짠 맛. 서울에 다녀갈 때마다 원기 돋우는 제육볶음의 익숙한 기름진 맛을 나는 늘 마음에 품고 다음 비행을 해나갔다. 호텔을 떠나 인천 공항으로 다시 가는 길엔 버스 차창 밖으로 밤이 깊어져서 더 아름다운 한강을 지나갔다. 다시 맛 볼, 기약없는 그날을 벌써 그리워하며 눈물 아룽지게 아름다운 한강을 바라보며 고기집에서 옆테이블의 아저씨들이 여러인종이 섞인 우리 테이블에 흘깃 눈길을 주며 따라 마시던 소주잔을 기억하며 마음 속으로 치얼쓰를 외쳤다. 당시 E항공사는 자정 5분 되기 전이 이륙 시간이었다. 자정에 신데렐라처럼 유니폼으로 환복한 모습으로 서울을 떠나 두바이로 향하던 내 마음엔 다른 비행과 다르게 고급 호텔의 뷔페 대신 제육볶음이 있었다. 고국에 대한 환상, 기름진 것들을 동료들에게 나눠주고 외국인 노동자로 살며 일 때문에 고국을 찾은 하루를 달고 매운 맛에 버무려서 빈속을 달랬다. 고요하게 동이 트는 다른 나라로 향하는 동안에도 제육볶음 덕분에 마음 한켠은 한강처럼 너울거리며 반짝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