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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쟁 Mar 24. 2022

쏨땀;시큼털털 짠내나는 외노자의 밥상 (feat.킴)

승무원의 도시와 음식

 비행할 당시 나에게 태국은 제2의 고향과도 같았다. 방콕은 당시 내가 근무 중인 E항공사가 하루 9번이나 운행하는 최고 인기 도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만석이었고, 부지런히 승객들을 모시며 가는 6시간 정도의 비행은 늘 강행군이었지만 승무원들은 불평이 없었다. 왜냐, 승무원들도 국적 불문 하나같이 방콕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매달 가고싶은 비행지를 비딩할때 내가 선점할 차례가 되면 나는 서슴없이 방콕을 적어냈다. 내 스케줄표에 한 달에 방콕이 세 번 뜨면 집에 가고싶어 하는 태국 승무원들이 내 스케줄과 바꾸려고 안달이 나서 불이 나게 연락이 왔다. 방콕가는 비행 브리핑룸에선 내 아이디 뒤에 방콕 간 횟수가 100회가 넘어 있는 걸 보고는 다들 너 한국 사람 맞냐, 태국에 남자친구 있냐고 놀리면서 놀라워했다.

 

 나는 왜 방콕을 좋아할까. MBTI 종특으로 구분하자면 나는 ENFP, 즉 호기심이 왕성한 탐험가이다. 내가 탐험할 세상은 넓고도 험했지만 방콕은 좁은 면적에 비해 안전하고 아늑했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유니폼을 벗어던지고 가벼운 여름옷으로 환복을 한 뒤 로비에 모인 우린 툭툭를 타고 MBK로 향했다. 때에 따라서 마사지샵을 먼저 가거나 식당에 단체로 몰려가서 게걸스럽게 한상 거하게 차려 먹기도 했지만, 만물상 M백화점 B가게 K의 줄임말인 듯한 (그럴 리가 없잖아!) 그곳엔 이 모든 것이 있었다. 간혹 무리에 들기 싫어하고 혼자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혼자 외출 나간 승무원들도 여기서는 꼭 마주치기 쉬웠다. 전자기기, 패션, 음식, 미술용품, 가짜 DVD까지... 나는 불법인 줄 알면서도 한국 드라마 마니아인 필리핀 승무원들의 등쌀에 못 이겨 복사본 DVD샵에 가곤 했다. 가서 최신 드라마 중에서 골라달라는 이유였는데 막상 가면 드라마를 안 좋아하는 나보다는 그들이 대화를 주도하고 나는 할인에 부족한 개수를 채우느라 강매를 당해서 미드나 다큐멘터리 전집을 사고 나오곤 했다 DVD를 주문하고 구워질 동안 각자 쇼핑을 하거나 뭔가를 사 먹으러 갔다. 난 당연히 먼저 먹었다.


 당시 내 최애 메뉴는 시큼 털털 뜨끈한 똠 양 꿍과 돼지고기 뱃살 삼겹살을 두툼하게 잘라 튀겨서 양파를 볶은 달콤한 소스를 찍어먹는 것, 그리고 메기를 통째로 기름에 튀겨서 그 위에 고수, 다진 마늘, 보라색 작은 양파의 종류인 샬럿 등을 마구 뿌린 요리, 여기에 어린 코코넛 속살을 얼려서 간 것을 코코넛 안에 넣어주는 고소하고 향기로운 크러쉬드 아이스 코코넛 주스, 또는 진하게 우려낸 달콤한 타이 티를 주문한다. 그리고 계절이나 그날의 기분에 따라 어떤 메인 디쉬가 오더라도 항상 주문하던 것이 있는데 바로 쏨땀이다.


 쏨땀은 태국식 김치라고나 할까, 영어식 메뉴엔 샐러드로 분류되는데 쏨땀은 초록 파파야의 속살을 채 썰고 라임, 코코넛 슈가, 피시소스, 마늘, 태국 고추, 건새우, 토마토와 약간의 땅콩 등이 들어간다. 사실 쏨땀은 MBK나 세련된 외형의 식당보다는 길가의 리어카에서 파는 것이 제맛이 났는데 리어카에서는 원하는 대로 기호에 맞게 주문을 할 수 있었다.


 태국 비행을 자주 다니며 호텔 근처에 단골이 된 미용실에서 미용사들과 같이 식사를 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이때 그들이 주문했던 쏨땀엔 작은 게가 들어있었고 우리나라의 어촌에서 해 먹는 김치 맛이 나서 새롭고 반가웠다. 비록 그들이 영어를 단 한마디도 못하고 나 역시 당시엔 파파고 번역기는 커녕 스마트폰도 없을 때라서 펌해달라는 것을 사진으로만 알아듣고 정성스럽게 드라이만 하는 바람에 다시 두시간이나 더 미용실에 앉아 있어야 했지만 당시에 얻어 먹은 현지인 밥상은 특별했고 같이 밥을 먹게 배려해준 것이 참 고마웠다.

 

 나는 방콕 비행이 잡히면 중간 사이즈와 큰 락앤락을 두 개 준비했다. 호텔 길 건너에서 항상 같은 시간에 나오는 쏨땀 리어카에서 쏨땀 네다섯 봉지를 사서 작은 락앤락에 넣고 이걸 다시 대형 락앤락 통에 넣어 두바이로 가져와 저장해 두고 먹었다. 김치처럼 익을라치면 여기에 양배추를 채 썰어 넣으면 다시 아삭아삭한 맛으로 먹을 수 있어서 일주일은 반찬으로 먹었다.

 

 서울 비행을 가도 김치를 사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가끔 해 먹었다) 두바이 냉장고엔 쏨땀이 주인장 노릇을 했다. 김치보단 덜 짜지만 달고 새큼한 맛에 다른 야채를 더 넣으면 샐러드가 되고, 고기 요리엔 겉절이 역할도 하는 기특하고 마음에 쏙 드는 맛이었다. 승무원이던 때엔 집에서 쌀로 밥을 잘 지어먹지 않았고 쌀밥에 반찬 대신 쏨땀을 먼저 떠올리고 다른 메뉴를 생각하곤 했다. 당연한 거지만 쏨땀은 흰쌀밥과도 잘 어울렸다. 다정하고 기특한 요리, 쏨땀은 그렇게 이방인 생활을 달래주고 위로해주며 함께했다.


 나한텐 쏨땀 같은 사람이 있었다. 승무원으로 부름 받아 두바이에 처음 도착한 날 같은 비행기에 타서 공항에서 만난 킴이라는 나보다 2살 위인 언니, 본명은 김 땡땡이지만 익명성을 지키려 그녀의 당시 활동명이던 영어 이름 킴으로 대신한다. 내 두바이 생활의 8할은 그녀와 함께 했다고 할 만큼 동거 동락했기에 함께 먹은 그릇수가 지구를 돌 지경일 것이다. 킴은 활달하고 잘 먹는 여자였다.  바로 나다, 아니 킴은 나보다 더 활달하고 가리는 사람도 없었고 가리는 음식은 나만큼 없었다. 내가 비행하며 만난 수많은 승무원 동료들 포함 모든 지인을 통틀어서 먹을 때 지친 기색 없이 보조를 맞춰나갈 수 있으며 내가 웃기 전에 먼저 웃음을 터트리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녀는 나와 다르게 메이크업과 꾸미기도 잘하고 좋아했으며 영어도 잘했고 머리가 좋았으며 정리정돈도 운전도 잘했다. 아마 내가 남자였다면 나는 킴이랑 결혼했을 거다. 다른 의도는 없고 그만큼 나랑 잘 맞았고 서로 의지했다는 뜻이다. 킴은 비행 5년 차에 한국으로 휴가를 갔다가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결혼하면서 비행을 그만뒀다. 할 만큼 했어. 다른 승무원들이 간혹 퇴직 전에 미련을 두고 아쉬워하는 반면 그녀는 달랐다. 서울로 가는 날 공항에서도 웃음 터지는 에피소드들을 가득 남기고 그렇게 도둑이 물건 훔쳐서 도망치듯, 올 때보다 더 급하게 5년을 청산하고 떠나버렸다.


  킴은 나와 쏨땀을 가장 많이 먹은 사람, 입에서 나는 마늘 냄새가 서로를 욕보이지 않는 사이였다.

 "아ㅡ 언니 왜 나만 딱딱한 당근 썰라고 해?""하하하하, 에고 들켰네. 야, 어디서 공짜로 먹을 생각을 해, 빨랑빨랑 썰어. 더 잘게 썰란 말이다." "너무 힘들어 당근 그만 넣자." "알았어, 다음엔 채칼 사놓을게." 

우린 그날도 언니 집에 모여 요리를 했다.주방도구도 없고 요리보단 청소가 시급했던 우리 집 주방 보단 재료며 도구가 제대로 갖춰진 킴의 집에서 주로 모였다. 쏨땀은 맥주랑도 잘 어울렸다. 지금은 술을 마시지 않지만 당시에 우리가 같이 먹던 모든 음식은 안주였다. 킴의 집 바로 아래에 있는 슈퍼에서 파파야와 재료들을 사서 재료들을 씻는 동안 우리는 인도 사람이 진행하는 영어 라디오를 들었다. 힌디 문화에 심취해서 같이 깔깔대며 웃었다. 1000개의 퍼즐도 맞추고 그림도 같이 그렸다. 전통 목선을 타고 찜 더위에 강을 건너서 하릴없이 길가를 배회하다가 낯선 자 또는 남자들에게 헌팅을 당하기도 했다. 어이없고 겁나하면서도 서로가 있었기에 "너 때문이야" "언니 때문이지"하고 농담하면서 서로의 특출난(특이한) 외모를 탓하며 웃었지만 속으로 기분이 나쁘진 않았던 것 같다. 웃음이 나보다 더 많고 눈웃음은 치사량이었던 킴 대신 늘 내가 그 남정내들에게 냉정하게 거절했다. 그럴 때마다 킴은 너 진짜 칼 같이 잘한다 하고 칭찬인지 모를 소릴 했다. 우릴 쫓아오던 철없는 남자를 따돌리고 허름한 현지인이 하는 식당에 들어가서 신선한 오렌지주스와 치킨샤와르마를 사먹으면서 더위에 벌겋게 익은 얼굴로 상추가 낀 이를 들이대며 실컷 웃었다. 


 시큼 털털... 짠맛. 쏨땀이 진짜 땀내처럼 느껴질 때 우린 같은 맛을 보았다. 타향살이에서 오는 힘듦, 외로움, 두려움을 말로 다 뱉어내지 못할 땐 그 맛을 아는 사이끼리 같이 먹으며 삼켰다. 킴은 내가 힘들 때 우는 대신 웃을 수 있게 해줬다.  채칼질을 하느라 손가락이 아렸다. 야채 껍질로 어지럽혀진 킴의 주방에서는 쏨땀이라는 이름의 추억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우리 중 한명은  전날 했던 비행에서 미숙한 일처리로 인해서 상사와 승객에게 욕바가지를 들었고, 다른 한 명은 한국 부모님 품이 그리워서 말도 못할 향수병에 걸려서 머리를 감다가도 눈물을 쏟던 때였다. 그러나 함께 듣는 라디오에서 쏟아지는 힌디음악에는 거리낌없이 덩실거렸다. 코를 찡하게 만드는 마늘 냄새와 라임의 새콤달콤한 냄새, 볶은 땅콩의 고소한 냄새가 뒤엉킨채로 쏨땀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20대 여자 외국인 노동자의 희노애락이 맛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그건 쏨땀일것이다. 태국 현지 식당도 아닌 두바이 승무원 숙소에서 먹는 쏨땀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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