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승무원 숙소에는 암막커튼이 있다. 나는 Al Bannai, 아랍어로 바나나라는 이름의 노란색 아파트로 이사한 뒤로 커튼을 열지 않았다. 비즈니스석에 올라간 지 일 년 정도 지났으려나, 비행한지는 약 3년 정도 되었을 쯤에 나는 우울증에 걸렸다. 그 뒤로 특별한 계기가 있기 전까지 약 3년간 유니폼을 입고 있을 때의 나와 그렇지 않은 나 사이의 괴리감으로 힘든 투쟁을 했다.
우울증의 특징은 자기 중심성에 있다. 내 감정엔 충실하지만 타인의 감정에는 무관심하다. 어떤 직업이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승무원과 우울증은 최악의 조합일 것이다. 두바이에 도착했을 때 나는 몸은 이십 대였지만 정신적으로는 부모의 품을 벗어나지 못한 햇병아리였다. 집, 학교, 도서관만 돌던 내가 무슬림들 사이에선 Sin city 범죄의 도시라고도 조롱받는 두바이에 던져졌다. 집 떠나 새롭게 만난 세상은 중독될 것들이 많은 곳이었다. 술, 도박, 여행, 쇼핑 그 외에도 많은 유혹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약한 나를 물들인 것은 우울감이었다. 당시의 나는 부모님 특히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정한 사건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서로를 향한 알 수 없는 냉대로 갈등의 골이 깊어져 있었고 두바이에 떠나 온 뒤로 마음의 시차는 좁힐 수 없어져버렸다. 비행에 가서 호텔 방마다 내가 적신 베개의 수만 헤아려보더라도 바닷가의 자갈처럼 느껴질 만큼 많이 울던, 외로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 시기 동안 나는 일 할 때 빼고는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킴과 두 명의 친한 batch mate (같이 졸업한 교육 훈련생) 외에는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우울증에 빠진 당시의 나는 내 이름으로 사는 대신 회사의 사번으로만 존재했다. 거실을 같이 쓰는 하우스메이트와도 마주치기 싫어서 스케줄을 확인하고 그녀가 캐리어를 끌고 나가는 소리가 나면 그제야 살그머니 방 밖으로 나가곤 했다. 비행 시절의 이야기가 늦게 글로 쓰게 된 이유도 아마 이 기간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이때의 깊은 밤에 혼자 맨발로 계곡을 건너는 시간이 있었기에 이후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있었다.
새벽 4시라도, 방금 운 얼굴이지만 화장을 하고 유니폼을 입으면 웃어야 했다. 승무원은 감정노동과 육체노동의 결합인데 유니폼을 입는 것 자체가 나와의 치열한 싸움이었다. 이 시기에 비행을 하다가 숨이 쉬어지지 않고 귀가 안들 리거나 공포감에 쓰러진 적도 몇 번 있었다. 비즈니스 클래스에 있는 바 라운지에서 손님과 대화를 하려는데 문득 엊그제 엄마와 했던 대화가 생각나서 눈앞의 손님과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고 숨이 안 쉬어지더니 이내 바 라운지의 모서리를 잡고 주저앉아버렸다. 손님과 곁에 있던 동료가 달려와 부축해주었고 이후 얼마 동안 응급용으로 있는 산소통을 매고 앉아서 쉬어야 했다. 오가는 승객들 사이와 바쁜 중에 내 몫의 일까지 해야하는 동료들 틈에서 창피하고 미안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렇게라도 잠시 내 의무를 져버리는 것이 차라리 속이 편했다. 장거리 비행 중에 벙커에서 지정된 휴식 시간에 쪽잠을 자다 일어나서 다시 일하러 가다가 쓰러진 적도 있었다. 알 수 없던 그때의 몸의 문제는 요즘 현대인들이 많이 겪는다는 공황장애였다. 휴가에 한국에 가서 한의원에 갔더니 어릴 적부터 나를 봐오셨던 아빠 친구분이신 한의사 아저씨는 화병이라고 하셨다.
곁에 앉아 계시던 아빠더러 딸 스트레스 안 받게 잔소리 좀 하지 말라고 웃으시며 나한테는 하루에 세 번 거울을 보고 소리 내서 웃으라고 하셨다.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혼자인 것 같은 심리 상태는 결국 방어적이면서 공격적인 성향이 되어 나타났다. 가면을 쓴 채로 일하지만 막말로 진상인 승객을 만나거나 행동이 거친 동료와 마주치면 나는 그 가면을 냅다 집어던지고 싸우려고 나섰다. 기분 좋게 일해도 힘든 비행기 안의 업무가 나로 인해 꼬이곤 했다. 같이 비행하는 동료들과 특히 나를 책임져야 하는 상사 그리고 안전과 친절함만 기대하고 탄 다른 승객들에게 누가 되기 일수였다. 비행을 가지 않으려고 거짓말로 병가를 너무 자주 내서 결국 경고장을 받기도 하고, 일 년에 한 번 있는 교육조차 가기 싫어서 어떤 해는 교육조차 병가를 내고 미뤘다. 나는 자주, 내 담당 매니저에게 불려 다녔다. 당시 내가 비행하는 동안에 회사의 규모가 커지는 바람에 우리 사번 쯤 되는 승무원들은 유독 매니저가 자주 바뀌는 편이었는데 내가 세어본 결과 퇴사할 때까지 8명이었다. 나중에 들어서 안 거지만 성실한 킴은 입사와 퇴사 외엔 칭찬받을 일로 매니저를 한번 만난 것뿐이 없었지만 난 매니저 8명을 모두 만났다. 우울증을 앓던 때 만난 매니저들은 대부분 자기가 맡은 수많은 승무원 중에서 유독 얌전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물의를 자주 일으키던 나를 기억했고 다음 매니저에게 내 이력을 상세히 적어서 남겼던 것 같다. 사건이 더해질 때마다 새롭게 만난 매니저는 나에겐 이미 익숙한, 전 매니저가 비쳤던 실망한 얼굴을 하고 나를 맞이했다. 나는 미안하고 잘못이 반복되지 않을 거라는 거짓 약속과 연습된 멘트로 매니저를 안심시키고 허탈한 마음으로 오피스를 나오곤 했다. 한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기에 경고장이 더해지지 않게만 경계를 지키며 살금살금 비행을 다녔다. 가슴에 돌이 얹힌 듯한 답답함과 격한 감정은 해소할 데를 찾지 못했다. 나는 마음의 무거운 돌들을 치워내는 법을 배우지 못했었다.
비행이 없는 날에는 바닥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거나 한없이 잠을 잤다.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아서 목욕을 하며 와인을 마시며 다이얼로 돌리는 오래된 티브이 속의 반복되는 아리랑 티브이를 보았다. 우리 집에는 인터넷도 없었고 밥솥도 없었다. 비행 다녀온 킴이 불러낼 때마다 눈부신 낮으로 나오는 게 싫어서 기어코 저녁쯤에 만나곤 했다. 당시의 나는 무기력하고 폭력적이고 충동적이었다. 우울함의 대표 얼굴인 자기 중심성과 감사함이 없는 낯을 해서 킴을 만났지만 그나마 그녀가 있어서 웃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간을 버티게 해 준 킴에게 너무나도 미안하고 고맙다. 그러던 어느 날 킴이 전화해서 그랬다. "나 오늘 머리 감다가 울었어." 왜 그러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내가 물들였나 싶게 킴도 어느새 우울감에 빠져들고 있었다. 지난 비행에서 돌아와서 꼼짝 않고 열 시간째 침대에 누워있다가 전화를 받은 나는 미안해졌다. 애지중지 아끼던 똥 같은 우울증을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었던 첫날이었다. 실제로 그날 오랫동안 열지 않은 커튼을 열고 중동의 한낮의 열기와 햇볕을 맛보았다. 한증막 같은 열기에 숨이 안 쉬어질 것 같은 순간이 오버랩되었다. 방을 서늘하게 하는 에어컨 때문에 창문에는 김이 서렸다. 커튼 밖의 내가 부정하는 세상이 하나의 심장이 되어 두근대며 내는 입김 같았다. 창문 밖에는 장 본 물건을 자전거에 실어서 배달하는 파키스탄 아저씨가 보였다. 두바이에 여름이란 계절이 반복되는 것 같은 것은 내 착각이었다. 우울증 너머로 내 호흡이 되찾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내가 헤치고 나와서 보니 우울증은 빠지기 쉬운 중독이기도, 유행같이 소리 없이 퍼져가던 것이기도 하다. 킴의 우울감을 접한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서 친한 친구의 느닷없는 결혼 소식을 문자로 받았다. 왜 미리 말 안했냐며 비행 스케줄을 조정하기에 늦어서 결혼식에 못 갈 것 같다고 하자 친구는 혼전임신이랬다. 친구만큼 나도 당황했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내가 기쁘지 않다는 것이었다. 무기력하고 화만 나던 당시의 내가 오랜만에 슬프고 처절함을 느꼈다. 실제 나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 친구에게 찾아온 생명이 나를 이불 밖으로 끄집어냈다. 친구에게 아이가 생긴 소식에 기뻐하고 싶다는 열망에 이불을 박차고 나왔다. 우울증의 특징은 자기 중심성에 있다. 암막커튼을 치고 고 스스로 갇혀 살던 나는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세계관을 걷어내고 다른 사람의 주위를 도는 태양이 되고 싶은 최초의 결심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