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바이몰의 필리핀 점원들
두바이 한량.
내가 나를 부를 때 주로 쓰던 단어 중 하나였다. 항공사에서 승무원으로 일하면 좋은 점 중의 하나가 남들 일하는 날 쉰다는 것이다. 이 점 때문인지, 누적된 피로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타고난 나무늘보기질 때문인지, 쉬는 날엔 무한정 늘어져 있기가 쉬웠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내가 가는 곳이 하나 있었는데 그 곳은 두바이몰이다. 거대한 돔 형태의 쇼핑몰을 하나의 행성으로 삼아 온종일 궤도하듯 산책하곤 했다. 나의 두바이몰 산책(?) 최대 기록은 9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보지는 못했다.) 1200개 이상의 가게가 입점해 있고 시간마다 분수쇼가 있으며 푸드코트엔 세계 각국의 음식이 있다. 천장까지 높은 아쿠아리움은 아무 생각없이 넋놓고 보기 좋다. (나는 앉아서 편하게 관람할 수 있는 비밀스팟도 알고 있었다.) 이것저것 만져보고 구경하다보면 종종 지난 비행에서 만났던 동료 승무원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대낮에 퀭한 눈에 좀비같은 행색으로 비닐봉투 하나씩을 들고 플립플랍으로 걷는 모습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 볼 수 있게끔 조작된 '승무원 코딩'과도 같다.
두바이몰에 가면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다양한 인종과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오후가 되면 느즈막히 기상을 한 두바이 원주민들과 나와 같은 이주민 그리고 두바이몰에 높은 빌딩인 부르즈칼리파 빌딩에 사진찍으러 온 관광객이 한데 섞여서 파도처럼 몰려다닌다. 이 중에서 두바이몰 어느 코너를 가도 만날 수 있는 국적이 있다. 바로 필리핀 국적 사람들이다. 이들은 영어를 구사하는 점, 그리고 예전부터 해외이주를 자주 한다는 점에 있어서 두바이의 각종 가게들, 식당에 점원으로 일하고 있다. 두바이몰은 층마다 구역이 있는데 전자기기만 파는 층에 가면 Sharaf DG 샤라프 디지라는 꽤 큰 전자제품 판매점이 있다. 여기에선 필리핀 점원들이 노래방 기계로 신나게 열창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흥과 끼로 치면 한국사람 못지 않다. 같은 국적이 모여 일하니 만큼 소통도 잘되고 뭉치기도 잘 뭉친다는 특징이 있다. 비주류의 법칙을 잘 보여준다.
E항공사의 본사에는 승무원과 기장이 매일 들리는 유니폼 세탁소가 있다. 집에서 세탁하기 힘든 유니폼을 세탁해주는 서비스를 맡는데 워낙에 큰 회사니 승무원의 수도 많다. 그래서 세탁소 안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10명 남짓 된다. 세탁소에 들어서면 여기가 필리핀인지 두바이인지 모를 타갈로어와 영어가 미묘하게 섞인 그들의 잡담과 업무용 대화, 그리고 꼭 누군가는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들은 늘 기분좋게 넉살좋은 태도로 피로한 승무원들을 맞이하고 반겨준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지만.)
필리핀 사람들은 한인 식당에도 많이 일한다. 필리핀 동료들과 일해보면 이들은 일머리가 빠르고 눈치도 빠르다. 그리고 예외없이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가는 나라마다 친척이나 지인이 산다! 한국사람들도 이민과 해외이주가 많아지는 추세지만 나의 필리핀 동료들처럼 미국에 사촌이 있고 덴마크와 일본에도 사촌이 있는 경우는 많이 보지 못했다. 이들의 유전자에는 어디에서나 노래하며 잘 적응할 수 있는 유전자라도 있는 것일까,싶었다. 10년이 지나도 필리핀 점원들이 두바이몰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사이즈가 없는 옷을 찾는 외국인에게 적절한 냉담함을 보여주고 손님이 적은 시간에는 예외없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물건을 가리킬 땐 손가락 대신 턱을 치켜들며 가리키는 사람들. 넉살과 유머, 흥을 아는 사람들. 가끔 태만해보이지만 효율성을 중요시하며 일 할 때와 하지 않을 때를 명확히 구분하려는 사람들. 두바이의 더위에 몰려다니며 왁자지껄 할로할로를 먹는 사람들. 두바이에서 이들을 대신 할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