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과 명예란...
두바이의 승무원 숙소로 쓰이는 아파트는 두세 건물마다 하나씩 슈퍼마켓이 있다. 잠깐 두바이의 슈퍼마켓의 특징을 살펴보자면,
1. 24시간 또는 밤늦게까지 하는 경우가 많다.
2. 대부분 돼지고기와 술을 팔지 않는다. 파는 경우에는 문이나 장소가 분리가 된 곳에서 주류, 돼지고기와 비할랄 가공식품류를 판매한다.
3. 가격과 관계없이 대부분 배달이 가능하다.
3번의 경우, 실제 이것을 풍자하는 그림을 그린 일러스트레이터도 있다. 두바이에 거주하는 영국인 클레어 네이퍼 Clare Napper가 그린 하이라이프 두바이는 내가 좋아하는 시리즈 중의 하나이다. 이 시리즈 중에는 문 앞에 초코바 하나를 배달하고 있는 배달부를 그린 그림이 있다. 저작권 때문에 그림을 참조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https://highlife-dubai.com/?utm_source=chatgpt.com <클레어 씨의 그림을 볼 수 있는 웹사이트를 참조한다> 전화 한 통에 시리얼이나 우유 한 팩도 배달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 배달이라 함은 우리나라처럼 차나 오토바이로 배달이 아닌 도보로 쇼핑카트를 끌고 오거나 자전거로 배달을 한다. (멀리 갈 일이 없는 이유는, 두세 건물마다 슈퍼가 있기 때문!)
더 재밌는 것은 생수와 같이 무거운 물건을 구매할 경우 바로 옆 건물이라도 구매자와 함께 집까지 대동하여 배달을 해준다. 더운 대낮엔 주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 시간대에 마트에 가면 높은 확률로 함께 집으로 걸어간다. 나와 뒤에서 카트를 끌고 나를 따르는 배달부 아저씨 또는 배달 소년이 함께 집으로 걷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뜨거운 태양 아래 선글라스를 낀 내 뒤로 내 짐을 실은 카트를 미는 사람이 걷는다. 주로 별말 없이 걷는다. 조선시대 양반가문의 아가씨와 아가씨의 짐꾼과 같은 행색이다. 내가 3년 정도 살던 건물엔 3년 내내 같은 슈퍼에서 일을 하던 인도 청년이 있었다. 그 청년의 이름은 야쉬, 21살의 인도사람이었다. 나는 우리 옆 건물 슈퍼에서 거의 매주 물 배달을 시켰기 때문에 야쉬의 배달을 자주 이용했다. 두바이 정착 첫 해엔 비행 뒤에도 힘이 남아서 슈트케이스를 이용해서 물이며 뭐며 죄다 내 힘으로 날랐다. 힘은 들어도 배달비 팁이며 누군가를 집에 들이는 번거로운 일을 하지 않았지만 연차가 올라갈수록 나는 체력을 아끼고 돈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나의 후한 팁에 야쉬는 나를 반기기 시작했다. 내가 슈퍼마켓에 들어서면 물건 정리를 하다가도 슈퍼마켓 쇼핑을 막 시작한 나를 쫓아다니며 필요한 것은 찾았는지, 비행은 어땠는지 어디에 다녀왔는지 질문을 쏟아냈다. 영어를 혼자 독학한다고도 했다. 자다 일어나서 마트에 갈 경우가 잦아서 나는 야쉬의 열정이 부담스러울 때가 많았다. 단답형으로 대답을 하기도 했고 그러면 야쉬는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가도 계산할 때가 되면 잽싸게 와서 내가 산 물건을 비닐봉지에 담고 있었다. 두바이의 슈퍼마켓에 대해 한 가지 덧붙이자면, 마트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는 캐셔와 별도로 계산한 물건을 비닐봉지에 담아주는 직원이 따로 있다. 코스트코나 대형 마트에서 가끔 있을 법한, 직원이 동네 슈퍼에도 있다는 것이 참신하다.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앞서 내 글에 등장했던 인스방파 출신의 나이 든 아저씨인 경우가 많았다. 공사장 같은 데서 힘을 쓰기 어려운 나이의 남자, 두바이의 공용어인 영어나 아랍어를 하지 못하는 사람. 야쉬는 그 일을 하는 아저씨를 밀어내고 내 쇼핑 품목을 착착 담는다. 그리고 다 담을라치면 캐셔보다 빠르게, 어김없이 묻는다.
"딜리버리?"
배달을 묻는 야쉬에게 어떤 날은 아니,라고 해야 했다. 내가 혼자 들고 갈 수 있을만한 물건들은 굳이 배달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때마다 야쉬의 친절한 영업에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집까지 함께 걸으며 야쉬가 물었다. 몇 살이냐, 어디에서 왔냐, 비행기에 타면 맛있는 거 많이 먹겠다, 어디 어디 가봤냐, 인도는 어디에 가봤냐 등등... 조사하듯 묻는 그에게서 무례함이란 찾아볼 수 없이 순전한 호기심만이 반짝였다. 열심히 대답해 주자 야쉬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경청했다.
그리고 다음 배달 때는 자기 이야기도 서슴없이 했다. '야쉬'라는 이름의 뜻은 '명예로운 사람', '성공'이란 뜻이라고. 그리고 자기는 이름 때문에 성공했다고. 이름이 아주 중요하다고 했다.
나는 야쉬의 월급 10배가 넘는 돈을 벌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성공? 명예? 뜻밖의 그의 고백에 돈으로 명예와 성공을 가늠해 오던 나는 속이 뜨끔했다. 그의 높은 자존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 분명 그의 열정은 낙천적인 성격과 높은 자존감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보게 되었다. 낯선 사람의 경계도 배달 서너 번 만에 무너뜨리게 하는 그의 태도는 본받을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비행 때마다 가끔 지금 이 순간도 열심히 일하고 있을 야쉬를 떠올리며 야쉬와 같은 태도를 갖으려 노력했다.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아도 회사는 돌아간다. 진심을 다하지 않더라도 손님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비행을 할 것이다. 하지만 야쉬처럼 한다면. 부르지 않아도 달려가는 삶을 선택한다면 누군가에겐 특별한 하루가 되겠지, 생각했다.
나는 성공한 사람이다, 명예로운 일을 하고 있다. 이름이 그렇게 중요하다. 내가 나를 부르는 이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