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한다고 다 아는 건 아니죠.
그래서 난 그림을 그려요.
다들 안 되는 거에 너무 애쓰지 말아요
결혼 전, 난 지금의 남편과 3년 정도의 연애를 했다. 그리고 그 3년 동안 우리는 몇 차례의 이별과 만남을 반복했었다. 헤어짐의 이유 또한 모두 같다.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서.’이다. 둔하고, 단순한 그 남자는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나의 마음을 그때그때 캐치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시절 그 남자는 이유도 모른 채 나의 침묵 폭격을 몸소 받아냈어야 했고, ‘연락 두절’이라는 냉전체제를 준비도, 동의도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내 마음을, 내 바람을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은 내 자존심에 위해되는 행동이라고 난 스스로 차가운 마녀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너무나도 좋은 그 남자와 결혼하기로 선택했고, 동시에 나는 그런 자존심을 버리겠노라고 다짐했다.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결혼을 하는 건데, 또 그와 같은 전쟁을 치르지 않고 싶었다.
그런 다짐 후에, 나는 그에게 하나하나 말을 해주었다.
“여보, 지금 이거 치워줬으면 좋겠어.”
“오늘은 하기 싫어.”
“아까 좀 서운했어.”
“나 지금 예민하니 혼자 있고 싶어.”
“아이들과 놀러 나가주면 좋을 것 같아.”
정말 난 계획한 대로 잘 실천하는 여자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좀 있다가. 나중에 치워도 되잖아.”
“나는 오늘 하고 싶은데.”
“서운할 게 뭐가 있었어?”
“또 예민 하대. 알 수가 없어.”
“너도 같이 나가자.”
‘그래, 그동안 다른 세계에 살던 사람들이 어찌 말 한마디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이렇게 난 한숨과 함께 단념했다.
내 교육법과 육아법 제1조 2항은 바로 “하나하나 정성스레 말해주자.”이다. (*1조 1항: 사랑이 기본이다.)
그것에 충실하고자, 나는 몇 년간 내 아이들에게 모든 내 마음을 전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열심히 난 말했다.
“친구가 저럴 때는 이렇게 해주면 좋겠어.”
“어른에게는 그렇게 안 했으면 해.”
“네가 지금 이러면 좋을 것 같아.”
“너 그렇게 하는 거 싫어.”
그런데 중요한 건 아무리 말해도 다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40대 신랑이야 오래도록 다른 방식으로 자라 온 데다가, 자기 생활 루틴이 어느 정도 잡혀있기에 내 말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건 이해하겠다. 하지만 저들은 어린아이들임에도, 철없고 물렁물렁한 아이임에도 내 말을 모두 듣지는 않았다.
우리 집 아이 2명만 그랬다면 어떻게든 내 말을 듣게끔 했을 것이다. 고함을 질러보기도 궁뎅이를 때려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만나고 가르친 1000여 명의 아이들이 모두 그러했기 때문에, 난 또 단념해야 했다.
상대의 말을 그저 듣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hearing과 listening의 차이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모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니까 말을 이해하는 영역과 범위도 다르나 보다.
‘말을 해야 안다.’
이 말은 틀렸다.
분명하게 나는 15년간의 실험으로 이를 증명했다.
‘말을 해도 모를 수 있다.’가 옳은 명제이다.
난 오늘 내 법 1조 2항을 개정한다.
완전히 바꾸는 것은 아니고, 이 말만 추가했다.
“말해줘도 모를 때는 내가 좋아하는 방법으로라도 표현한다.”
그리고 나는 부칙도 만들었다.
‘이 법은 언제나 ’ 오늘‘부터 시행한다. 유효기간은 또 법이 개정될 때까지이다.’
땅 땅 땅!
내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이유는, 바로 이거다.
말해줘도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