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를 부탁해

72시간의 냉장고 파먹기

by 누피

결국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말았다. 냉동실 밑바닥에 잠자고 있던 화석들이 하나 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지난 추석부터 알박기 되어 있던 시래기와 버석하게 마른 멸치, 돌덩이가 되어버린 분쇄육이 차례대로 구출됐다. 킁킁. 쿰쿰한 냄새에 미간을 찌푸렸다.


마지막주 29일에서 31일 사이는 쪼들림이 극한이 되는 시기다. 이 마의 3일은 언제나 나를 시험에 들게 했다.신용카드로 해결될 일이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냉동실에는 귀찮아서, 잊어버려서, 때로는 무서워서 외면하던 식재료들로 가득했다. 3일 정도라면 나의 주부력으로 충분히 커버 가능할 것이다.



시래기를 넣은 된장국이 보글보글 끓고 있다. 수저로 거품을 걷어낸 뒤 종지에 국물을 담아 후루룩 들이켰다.기분 탓인지 뒤끝에 살짝 쉰맛이 느껴졌다. 괜찮은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결국 아이들을 소환해 '이상 없음' 을 확인 받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이 됐다. 된장국이 그새 많이 줄어있었다.

조미김을 뜯고 김치를 소복히 담았다. 들기름으로 부친 계란프라이 가장자리가 누룽지로 바삭했다. 빨강, 노랑, 초록이 조화를 이룬 식탁은 꼭 8색 크레파스 같았다. 척박한 환경에도 꽃은 핀다더니 어떻게든 입에 풀칠을 하는게 신기했다.


의욕적이던 어제와는 다르게 하루도 안 지나 열정이 뚝 떨어졌다. 아무래도 날씨 때문인 것 같았다. 불 앞에 설 자신이 없었다. 귀찮을 땐 한 그릇 요리지- 냉동면과 새우를 털어 볶음우동을 만들기로 했다. 양배추의 시커먼 단면을 보며 잠시 흠칫했지만 단맛을 위해서는 양배추가 필수였다. 기름을 두른 팬에 다진 마늘, 새우, 양배추를 볶고 청주로 비린내를 날렸다. 진간장, 굴소스, 꿀, 고춧가루, 후추를 넣은, 적당히 달고 짭짤한 소스가 오늘의 킥이었다.


“우와 맛있겠다. 엄마, 오늘 무슨 날이야?”


평소에도 면이라면 환장을 하는 아이들이었다. 애써서 차린 한식보다 이런 면요리를 더 특식으로 쳐줬다. 면 위에 견과류와 가쓰오부시를 올렸다. 후루룩 면치는 소리가 벽을 타고 천장까지 스테레오로 퍼졌다. 과정은 미약해도 결과는 아름다운, 이것이 바로 냉파의 묘미였다.


오늘은 또 뭐 먹지? 한숨을 쉬며 옆으로 돌아 눕는데 메신저 알람이 띠리링 울렸다.


"시골에서 감자랑 양파 보내왔는데 먹을래?'


친한 언니의 메시지에 허겁지겁 옷을 꿰어 입었다. 감자와 양파로 두 손은 무거웠지만 마음만은 한없이 가벼웠다. 어쩐지 돈 번 느낌도 들었다. 감자볶음, 감자국, 양파장아찌가 일사천리로 식탁에 올랐다. 갓 지은 밥에 방금 만든 반찬은 웬만하면 다 맛있다지만 빈말이라도 엄지 척해주는 가족들 덕에 힘이 났다. 가족들은 나라는 단순한 인간의 사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상을 물리고 청소를 하는데 콧노래가 나왔다. 내일이면 드디어 월급날이구나. 다이어리에 장 볼 목록을 적는데 가슴이 뛰었다.


지난 냉파를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 월초에 생각 없이 막 쓰면 월말이 얼마나 비참해지는지, 사놓고 모른 척했던 재료들은 어떻게 복수를 해오는지.

이제 더 이상의 냉파는 없다. 비장한 각오로 재고조사를 마친 뒤 포스트잇에 재료현황을 적어 냉장고 문에 붙였다. 역시 사람이 좀 없어봐야 어려운 것도 아는가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난 3일은 내 인생에 가장 겸손한 시간이었다.

keyword
이전 06화엽떡과 바꾼 일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