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떡과 바꾼 일주일

어쩌다 돼지가 된 건에 관하여

by 누피

건강검진표를 작성하다 몸무게에서 멈칫했다. 마지막으로 잰게 언제더라?

체중계가 망가진 이후부터였으니 아마 반년도 넘었을 것이다.

내키지 않는 발을 질질 끌며 체중계 앞에 섰다.

머리 위 막대가 웽 소리를 내며 정수리에 닿았다 떨어졌다.


키 161.6cm

몸무게 65kg


그렇다, 우리집 체중계는 망가진 것이 아니었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체중계를 발로 탕탕 찼다.

숫자들이 깜빡거리며 일순간 사라졌다.

왼쪽 다리를 떨며 검지 손톱을 물어뜯었다.

몸무게는 항상 뒷자리 5를 기점으로 순식간에 앞자리를 바꿔놓곤 했다.

그러니까 이건 명백한 경고의 메시지였다.



알고보면 삶의 많은 문제들이 돈과 연결되어 있다.

다이어트도 마찬가지다.

한 달에 50만원짜리 위고비나 전문가의 식단, PT만 있으면

쉽게 해결 가능한 일들을 나는 내 시간과 노동력을 전부 갈아넣어야만 얻을 수 있었다.

식구들 끼니 챙기기도 바쁜데 다이어트까지 하려면 힘도 두 배로 들것이다.

시작도 전에 겁부터 났다. 마지노선이 필요했다.

딱 일주일. 일주일이 지나도 살이 안 빠지면 때려치울 생각이다.

불금에 먹는 엽떡도 내게는 소중하다.



뚝뚝 끊어지는 맛이 일품인 두부면이었다. 풋내가 나는 면위에 토마토 소스를 부었다. 찰기 없는 면이 힘 없이 늘어졌다. 상부장 꼭대기에 잠자던 포트메리온 접시를 꺼냈다. 식탁 위에 매트를 깐 뒤 와인 잔에 제로 사이다를 따랐다. 사이다가 치익소리를 내면서 달콤한 기포를 일으켰다. 평소에는 설거지거리 늘리기 싫어 개밥스타일을 고수하던 나였다. 하지만 어떤 음식은 기분으로 먹지 않던가. 각 접시에 반찬을 정갈히 담고 좋아하는 그릇에 파스타를 먹는 내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다.


떡볶이가 먹고싶어 곤약떡을 주문했다. 떡이라고는 하지만 쌀은 전혀 들어가지 않은, 형태만 떡모양을 한 100% 곤약이었다. 봉지를 뜯으니 시큼한 꼬랑내가 났다. 속이 텅 빈 지우개를 씹는 느낌이었다. 빨간 양념으로도 커버가 안되는 강력한 존재감이었다. 급한대로 두부면도 넣고 삶은계란도 부숴보지만 역부족이다. 뭐랄까, 아주 창의적인 짝퉁의 맛이었다. 엽떡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역시나 닭가슴살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했다. 김밥김에 현미밥을 깔고 오이와 닭가슴살을 일렬로 깔아 다이어트 김밥을 만들었다. 빈약한 속재료 탓에 옆구리가 자꾸 터졌지만 맛은 최고였다. 남은 닭가슴살은 덮밥이나 생채소에 넣어 포케로 먹었다. 어느 날은 손으로 잘게 찢어 닭계장을 끓이기도 했다. 같은 재료로 매일 새로운 요리가 나오는게 신기했다. 하기 전에는 손사레를 치다가도 일단 한 번 시작하면 집요하게 파고드는 (음식 한정) 나의 성격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작은 변화도 생겼다. 일단 멀쩡한 식탁을 놔두고 주방에 서서 밥을 먹던 습관이 사라졌다. 가족들의 식탁을 물린 뒤에 혼자 먹는 식사는 여유가 넘쳤다. 부족한 반찬을 나르느라 이리저리 움직일 일도, 아이들에게 생선살을 발라 주다가 식은 밥을 먹을 일도 없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천천히 밥을 먹고 있노라면 어쩐지 귀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를 돌보는건 생각보다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식단에서 뿌리내린 나무는 홈트레이닝이라는 가지를 뻗었다. 나는 와이존이 드러나는 레깅스를 입고 좀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웃으며 '한 번 더'를 외치는 유튜버들과 동작을 같이 하다보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뚝딱거리는 나를 구경하던 아이들이 슬며시 합류했다. 세 모녀가 다리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며 찢고 꺾는 모습은 한 편의 희극같았다. 큰아이가 다가와 내 허벅지를 만지며 말했다.


"엄마 허벅지가 단단해졌네? 원래는 인절미 같았는데"


쯧. 입에서 단내가 폴폴 올라왔다.






일주일만에 체중계에 올랐다. 팔과 다리를 털며 심호흡을 크게 했다.

이날을 위해 일부러 몸무게를 재지 않고 버텼다. 극적인 숫자로 더 큰 기쁨을 만끽할 요량이었다.


63.8kg


응?

체중계를 오르락 내리락 거리며 재차 숫자를 확인했다.

요지부동이다.

다급한 마음에 윗옷을 벗고 바지도 벗었다.

끝내 알몸이 된 내가 얼음이 되어 체중계를 노려보고 있었다.


과정은 즐거웠으나 결과는 처참했다.

과정이냐, 결과냐..

둘 중 무엇을 취할지는 나의 선택이었다.

발바닥으로 체중계를 연거푸 내리쳤다.

망할놈의 체중계, 이번엔 반드시 망가트릴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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