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농사 반감기
계좌에 마이너스가 선명하다. 일, 십, 백, 천만, 십만.. 무수한 동그라미들을 손으로 하나씩 짚어가며 기억을 더듬었다. 국어, 영어, 수학과외에 인강까지 거기에 곱하기 2를 하니 (애가 둘이다) 얼추 계산이 맞았다. 두 손을 모아 얼굴을 쓸어내렸다. 언젠가부터 사교육비는 내 월급을 육박했다. 하우스푸어에 이은 에듀푸어의 탄생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술 담배보다 끊기 힘든 게 학원이다. 학원은 다니는 것보다 다니지 않는 것에 더 많은 결단을 필요로 했다. 아이를 처음 학원을 보낸 것은 4살 무렵이었다. 오감을 활용해 창의력을 끌어낸다는 미술 학원은 교실의 벽과 바닥이 전부 비닐로 덮여 있었다. 그 위에 물감을 바르고 뿌리는 것이 수업의 주된 내용이었는데 별도의 교육의 필요할 것 같지 않은 행동에 의구심이 들 때면 원장은 웃으며, 그러나 매우 단호히 말했다.
"몰라서 그렇지 아이들도 스트레스가 있어요. 퍼포먼스는 내면의 스트레스를 분출하고 아이들의 자율성과 자신감을 향상시킵니다'
원장은 하얀 도화지 위에 총천연색 수채화를 그려 보여 주었다. 그것은 내게 일종의 치료제였다. 나는 병원 가듯 학원을 들락거렸다. 사교육은 불안을 먹고 점차 몸집을 불려 나갔다.
엄마들은 학원을 액세서리처럼 달고 다녔다. 최신정보는 쉴 새 없이 업데이트 됐다. 뒤처져 있다는 생각은 공포와 죄책감을 낳았다. 영어와 수학 같은 주요 과목은 한 번 시작하면 끊기 어려웠다. 그렇게 초등 때부터 영수가 기본값이 된 상황에서 피아노, 수영, 미술, 요리 등의 예체능을 돌려가며 보냈다. 계좌는 날로 쪼그라들었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힘이 들었다. 밥 먹고 씻고 숙제하고 잠드는 똑같은 하루가 반복됐다. 아무도 행복하지 않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잘 모를 땐 그저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사교육 의존도는 더욱 높아졌다. 국영수를 놓치지 않으면서 수행평가까지 챙겨야 했다. 내 바람과는 달리 아이의 성적은 널을 뛰었다. 전교생의 40프로가 A를 받는는 절대평가임에도 수학성적은 바닥을 기었다. 상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아이의 성적이 곧 나의 성적이었다.
수소문 끝에 찾은 서울대 출신의 선생님은 수학 30점대에서 100점까지 성적을 올린 전적이 있었다. 그 스토리 하나를 믿고 50만 원이라는 거금을 지불했다. 모자란 학원비를 충당하기 위해 오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저녁마다 온몸이 쑤셨지만 내심 열심히 사는 내 모습을 보면 아이도 덩달아 열심히 살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했다. 하지만 자식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오후 아르바이트가 취소되어 예고 없이 집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아이는 집안이 울리도록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소파에 기대어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먹다 남은 과자봉지가 선풍기 바람을 타고 내 발 앞까지 날아왔을 때 머리끝까지 꼼꼼히 혈액순환이 되는 것을 느꼈다.
"너 지금 뭐 하냐?"
놀란 아이가 사색이 되어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악을 쓰며 문제집을 마구 집어던졌다. 아이는 내내 공부를 하다 잠깐 쉬는 거라고 항변했지만 그런 얄팍한 핑계가 통할리 없었다. 울어야 하는 건 아이인데 내가 눈물이 나왔다. 실망감과 분노가 뒤섞인 피눈물이었다. 감정이 요동을 쳤지만 시험이 코앞이었다. 어떻게든 이 위기를 넘겨야 했다.
'딱 이번 시험까지만. 그래도 성적이 안 나오면 그땐 전부 그만두는 거야. 더 이상 학원 전기세 내줄 수는 없어.'
연습장 한 장을 찢어 '2025 중간고사 시험대비 계획'이라고 적고 형광팬으로 줄을 쫙쫙 그었다. 일단 악의 축인 핸드폰부터 처단했다. 금고를 마련해 핸드폰을 감금했다. 책상대신 주방의 식탁을 거실로 옮겨와 거실공부를 시작했다. 딴짓 방지를 위해 인강은 함께 듣기로 하고 사회, 역사 같은 암기과목은 퀴즈형식으로 공부하며 능률을 올렸다. 문제의 수학은 고득점은 포기하고 기본문제만 맞추는 걸로 전략을 바꿨다. 엄마의 급진적인 처사에 아이가 반항했지만 그때마다 내 피 같은 돈을 날로 먹지 말라며 맞불을 놓았다.
"마지막에 마킹을 잘못해서.. 진짜 맞을 수 있었던 건데.. 미안해.. "
옹색한 변명이 측은하기까지 했다. 시험지는 50점부터 100점까지 골라보는 재미가 있었다.
말없이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1. 부정- 시험이 어려웠나? 아니면 너무 긴장을 했나?
2. 분노- 얘 바본가? 어떻게 이것도 못하지?
3. 타협- 내 공부방법이 잘못됐을까? 아니면 학원 문제일 수도?
4. 우울- 물려줄 재산이 있었으면 이렇게까지 공부공부 안 했을 텐데..
5. 수용-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
만약 지금까지 들어간 학원비를 모아 서울에 집을 샀으면, s&p 500에 넣었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여지껏 전셋집을 전전할 일도, 노후를 걱정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몸서리를 치며 주방으로 가다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잔뜩 기가 죽은 아이를 보니 문득 4살 때 그 미술학원 원장이 생각났다. 망할 물감놀이는 끝내 아이의 자율성도 자신감도 향상 시키지 못했다.
그래 인정하자, 더 이상 나의 통제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그럼에도, 이 와중에도 혹시 모를 반전을 기대하며 실낱같은 기대를 버리지 못한 내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죽을 때까지 자식문제만큼은 쿨하지 못한게 부모일까? 질척거리는 모성이 부디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길 바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