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참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태풍 소식이 들린다. 곧 비가 잔뜩 내리겠지. 억수같이 퍼붇는 비를 따라 우리 엄마 기분도 땅바닥보다 더 깊숙히 스며들겠지.
교복을 입었을 때의 나는 비 오는 날이 참 좋았다. 비를 맞는 것도 무섭지 않았고, 내리는 비가 몸에 들러붙어 쾌쾌한 냄새가 나더라도 괘념치 않았다. 몸이야 다시 씻으면 되고, 옷이야 세탁하면 되니까.
성인이 된 후 가족의 분리를 겪고 나서는 비 오는 날이 너무나 무섭다. 미워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님을 알지만, 비 오는 날이면 빗방울 하나하나가 모두 미울 지경이다.
비가 퍼부을 때마다 엄마의 우울은 빗줄기를 따라 범람했다. 그 우울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하는 사람은 나 뿐이었다. 자꾸만 무언갈 먹고 싶어 하고, 자꾸만 굳이 삶에 대한 의문을 내놓았다. 이전에는 어떻게든 긍정적인 말을 해 보려 애썼다면, 지금은 잘 모르겠다. 언제쯤 나아질까, 생각만 가득한 상태로 함께 맞장구 쳐 주는 것 조차 지쳤다. 어른인 엄마를 자식인 내가 달래어 주고 있는 상황이 퍽이나 웃겼다.
어김없이 비가 오면 한없이 가라앉은 엄마를 보면 이전에는 참 걱정되고 무서웠는데, 이제는 그럴 마음 조차 빠삭 말라버린 기분이다. 엄마를 보면 이런 마음이 생겨난다.
- 엄마, 나는 왜 어른들 싸움 사이에 껴서 이렇게나 힘들어야 해? 내가 무슨 잘못을 했어? 어른들의 선택들로 왜 내가 지쳐야 해?
의문들 모두 미안하다는 대답 뿐이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두 발을 땅에 붙인 채 살아 있기에 최선을 다 해 살아야 하는 만큼, 생각이 끝없이 이어질 때면 이 말을 떠올린다.
여름을 견딜 수 있는 이유는
곧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보았던 문구인데, 너무나 당연하면서도 미처 잊고 있던 생각이었던 터라 기억에 남는다. 맞지, 곧 지나가지. 곧 찾아 와 주길 바라는 기대감으로 지금의 서러움을 꽁꽁 포장한 채 눈물을 벅벅 닦는다.
동생이 우울증과 더불어 공황 증세가 보이기 시작했다. 동생은 기나긴 고민 끝에 아빠 집으로 갔다. 여전히 우리는 자주 만나고, 이야기도 잘 나누는 가족이지만, 엄마는 무척이나 마음이 공허했다고 한다.
- 같이 지내는 게 얼마나 힘들었으면 아빠 집으로 갔을까, 왜 내 성격은 이럴까-.
등의 죄책감이 피어났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알 수 없는 울렁거림이 찾아 왔다.
- 엄마, 왜 나한테는 그런 마음이 든다고 얘기하지 않아? 그나마 내가 괜찮은 상태여서 나한테만 힘들게 하는 거야?
미처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물음표가 내 속을 참 불편하게 한다. 우리 집은 참 사연 많은 집이다. 누구하나 안쓰럽지 않은 사람이 없다. 안쓰럽다 못해 온 마음을 내어 줄 수 있을 만큼 소중하고 예쁜 사람들이다. 한없이 밉다가도 한없이 미안해지는 우리 엄마. 이런 마음을 반복하는 나는 착한 딸이 될 수 없나 보다. 내가 더 순하고, 더 참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치만, 엄마 나는 매일 온 마음을 다 해 엄마를 생각해. 지금이 서럽고도 서러운 이 시기라면, 부디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개인 것처럼 무탈히 다정만 남기고 곧 지나가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