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동가리

( The Clownfish )

by 그냥예정




흰동가리

( The Clownfish )



01

해가 질 때 즈음 출발했다. 긴 하늘을 달려 도착한 이곳은 아직 해가 떠 있다. 화창했다. 이곳에 오는 동안 쌓였던 고됨이 가실 정도로 화창했다. A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이모, 지금 도착했어요.”

전화기 너머로 밝은 이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A야, 벌써 도착했어? 이모가 빨리 출발했는데 계속 차가 막히네. 조금만 더 기다려 줄래?”

“네, 그럴게요. 천천히 오세요.”

이모는 그래, 라며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A는 가방에 전화기를 넣고는 공항을 걸었다. 주변은 온통 영어로 가득했다. 간판에 적힌 문구들이며 사람들의 말소리까지도. 이제야 실감이 난다. 내가 지금 미국에 있구나. 내가 정말 미국에 왔구나.

유학을 가고 싶었다. 조금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른 언어를 쓰는 곳에 살아 보고 싶었다. 다른 눈을 가지기 위해서. 그 눈을 가지면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세상은 변해야 합니다!]”

큰 목소리가 들렸다. 세 명의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멀찍이 서서 그들의 말을 들었다. 피켓에 적힌 문구도 살폈다. ‘Legalization of homosexuality’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동성애 합법화를 외치고 있었구나. 사람들은 그 무리 가까이 지나가지 않았다. 옆에 있는 것 자체를 꺼렸다.

“[언제까지 이성만 갈구할 것입니까!]”

셋 중 가장 오른편에 있는 사람이 소리쳤다. 사람들은 저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A는 왜인지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그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모두 같은 색과 같은 디자인에 같은 문구가 쓰인 옷을 입고 있었다. ‘Homo sapiens’. 동성애 합법화를 지지하는 단체에 속하는 저들은 ‘호모 사피엔스’라고 불린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갈 무렵 등장한 신인류, 호모 사피엔스. 자신들이 그런 존재라고 말했다. 세상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빙하기가 끝날 때 등장한 호모 사피엔스처럼 세상이 바뀔 기미가 보였을 때 자신들이 등장했기에.

호모 사피엔스 단체에서 동성애 합법화 요구는 한 세기가량 계속되고 있다. 동성애가 전 세계적으로 법이 정의한 불법이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지금 사는 이 사회는 어겨서는 안 되는 규칙이 있다. 일명 ‘우리 모두 약속합니다.’ 규칙. 이는 곧 법률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우리 모두 약속합시다.>

1. 동성애를 금지한다.
2. 성전환 수술을 금한다.
3. 사회적으로 정의된 남성과 여성의 교제와 혼인만을 허락한다.
4. 위 조항 중 하나라도 어길 시 이에 합당한 처벌을 가한다.


아침 방송에는 늘 같은 말이 나온다. ‘깨끗한 세상, 우리 모두 약속을 지킨 덕입니다. 앞으로도 그 약속 지켜 주세요.’ A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항 안에 있는 서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02

A는 B 작가의 책을 좋아했다. 고등학교에서 영어 선생님께서 소개해 주신 책 하나가 있었다. ‘4U’라는 제목을 지닌 책. 번역본을 다 읽고 나니 원서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이었다. 원어로 읽는 책의 느낌이 궁금해진 순간은. 이 책을 원서로 읽기 위해 언어를 공부하고, 이에 어울리는 삽화를 그리고 싶다는 다짐으로 이곳에 왔다. 곧 B 작가 신작이 출간된다고 했는데. A는 말을 읊조리며 작가의 책을 찾기 위해 천천히 서점을 거닐었다.

“저기 있네.”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B 작가 신작 <<흰동가리>> 출간 이벤트.’ 책이 모여져 있는 곳에 서니 이벤트 하나가 소개되어 있다. A는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마음으로 밑에 글자를 천천히 읽었다. ‘사인회.’ B 작가의 사인회를 알리고 있었다. A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B 작가의 얼굴을 처음으로 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사인회도 이번이 처음이고, 더군다나 B 작가의 얼굴은 인터넷에 검색해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성별에 대한 말만 존재했다. 이에 대해서도 추측성 글들뿐이다. 그만큼 B 작가의 모습은 알려지지 않았다. A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참여 방법을 살폈다. 작가가 해외 일정을 마치고 입국하는 이곳의 공항에서 내일 오후 8시에 사인회에 시작되는데, 방법은 간단했다. 구매한 신작을 지참 후 줄을 서면 된다.

“당일 날 산 책이어야 하나?”

A는 두리번거리더니 직원을 찾았다.

“Excuse me.”

A의 부름에 직원 한 분이 미소를 지으며 무슨 일이신가요, 물었다.

“[B 작가 사인회 참여하려고 하는데요, 미리 구매해서 들고 와도 될까요?]”

A의 말에 직원은 당연히 됩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런 직원에게 A는 허리를 살짝 숙이며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지금 사면 되겠다. A의 손에는 이미 B의 신작이 쥐어져 있었다. 미국에 온 첫날부터 기분 좋은 일이 생겼다.

계산을 다 했을 때 즈음 이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이모!”

“A야, 이모 지금 1번 출입문 앞에 있는 주차장이야.”

“네, 금방 갈게요.”

A는 책을 가방에 넣고는 빠른 걸음으로 이모에게 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이모가 보였다. 이모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선명하게 붉은 승용차. 풍성하고 긴 머리칼. 붉은 자동차와 어울리는 붉은 입술. 그리고 선글라스. 누가 봐도 이모였다. 온 가족이 나가라고 떠밀었던 그런 이모. 그런 이모는 내 롤모델이었다. 지금도. A는 이모에게 걸어갔다. 이모 역시 A를 알아보고는 걸어왔다. 이모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A를 반겼다.

“A야, 너무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상투적인 인사에 A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모도 그런 조카를 따라 같이 웃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따분한 인사였어. A는 입꼬리를 올린 채 맞아요, 라며 마저 웃었다. 이모는 얼른 차로 가자, 라며 A의 짐을 들어 주었다.

이모의 차는 오픈카였다. 덕분에 달리는 내내 맑은 바람이 얼굴에 맞닿았다. 기분이 좋다.



03

A는 화창한 이곳 날씨를 만끽했다. 이모는 그런 A를 살폈다. 무엇이 그리도 기쁜지 미소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궁금하다. 무엇이 그리 기쁠까. 이모는 밖으로 보고 있는 A에게 물었다. 뭐가 그리 기쁘길래 계속 웃고 있어. A는 자신조차도 모르고 있었던 자신의 표정이 들켰다는 마음에 괜히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나도 알려 줘봐, 같이 좀 웃게.”

A는 별거 아니에요, 라며 말을 시작했다.

“내일 제가 제일 좋아하는 B 작가 사인회가 있어요. 마침 여기 공항에서 열린대요. 그래서 내일 그 작가님 만날 생각하니까 기분이 좋아요.”

이모는 A의 말을 듣더니 같이 미소를 지었다. 얼마나 좋아하는 작가이길래, 생각만으로도 기뻐할까.

“그나저나 A야, 너 이모 집에서 여기까지 오는 방법 알아?”

이모의 말에 A는 순간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했다. 곧 천천히 고개를 두어 번 저으며 아니요, 라고 말했다. 이모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내가 데려다줄 수 있으면 데려다주고 안 되면 대중교통 알려 줄게. 이모의 말에 A는 네,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A는 고개를 돌려 보고 있던 풍경들을 마저 보았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너무나 푸르렀기에. A는 가방에서 조금 전 공항 서점에서 사 놓은 B 작가의 책을 꺼내었다. 급하게 구매하느라 미처 살피지 못했던 책의 표지를 살폈다. ‘흰동가리’라는 제목과 어울리는 흰동가리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저 무채색으로. 무채색이어서 더 눈이 갔다. 지금 당장 읽고 싶었지만, 이모네 집에 가서 짐을 모두 풀고 잔잔한 마음으로 읽고 싶었다. A는 다시 가방 안으로 책을 넣었다.




다양한 색깔의 차들과 함께 달렸던 고속도로를 벗어나서 얼마 더 안 가 이모 집에 도착했다. 이모 집 앞에는 정원이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다양한 색깔을 가진 꽃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초대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길 잘했다. 미국에 오고 나서부터 좋은 일들만 생겨나고 있다. 정말, 오길 잘했다.

A는 이모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햇볕이 잘 들어오고 있었다. A는 햇볕이 드리운 곳으로 걸어갔다. 그곳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따뜻했다. 매일 기분 좋은 아침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A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내 짐을 들고 유학 기간에 생활할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짐을 내려두고 방문을 열자, 이곳도 햇빛이 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모의 집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하다. 선명한 색깔을 띠는 꽃, 큰 창문, 그리고 햇빛. 순식간에 나는 낯선 이곳을 이 나라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으로 정했다.

짐을 풀었다. 짐 하나하나를 꺼내어 배치하고, 정리했다. 짐을 다 놓고 방을 둘러봤다. 여백이 가득했다. 짐을 많이 가져오지 않은 덕이었을까. 여백도 마음에 들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A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이모는 들고 있던 물 한 컵을 A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물었다.

“A야, 언제부터 학교 가는 거야?”

A는 물을 마시고 있던 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음 주 월요일이요. 이모는 그 전까지는 푹 쉬어, 라고 말했다. A는 그럼요, 라고 웃으며 답했다.



04

감은 두 눈의 눈꺼풀 위로 햇빛이 맞닿았다. 자연스레 눈이 떠졌다. 개운했다. 푹 잤기에. 내 예상이 맞았다. 기분 좋은 아침을 맞이했다. A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일 방 안을 살폈다. 밝았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 덕에 내 방은 환해졌다.

나갈 채비를 마치고 A는 방문을 닫고 나갔다. 부엌으로 가장 먼저 갔다. 식탁 위에는 이모가 해 두신 음식이 있었다. 그 옆에는 쪽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A야, 이모가 오늘 꽃 단체 주문 때문에 포장이 밀려서 해서 먼저 갔어. 맛있게 먹으렴.’

나는 쪽지를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용기의 뚜껑을 열었다. 참치 마요 샌드위치 두 조각이 담겨 있었다. 미리 내려두신 커피도 컵에 따랐다. 맛있었다. 이곳에서 먹는 음식이라면 다 맛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금세 접시를 비웠다. 빈 그릇들을 싱크대에 넣어 설거지까지 마치고 나서야 A는 겉옷을 입을 수 있었다.

A는 집 밖으로 나와서 이모가 미리 주고 간 열쇠로 문을 잠갔다. 살짝 당겨보며 잘 잠겼는지 확인했다. B 작가의 책도 잘 챙겼으니 완벽하다. 미국에서 보내는 첫 하루이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기분이었다. A는 우선 걸었다. 이모가 아무래도 데려다주지 못할 것 같다며 내게 주고 간 대중교통 표를 보며. 오후 8시까지는 아직 시간이 여유가 있으니까 우선에는 공항으로 가서 그 주변에서 시간을 보내야지. A는 이모가 알려준 지하철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자리가 널널했다. A는 출입문과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세 정거장 정도 갔을 때 피켓을 든 사람들이 지하철에 올라탔다. 어제 공항에서 본 사람들과 같은 옷을 입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구나. 한 사람이 큰 목소리로 승객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성별을 정할 권리가 있습니다! 언제까지 정해진 성 역할 속에서만 사실 겁니까!]”

오늘은 성전환자에 대한 호모 사피엔스 단체이구나. 승객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뿐이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리도 옮기는 사람 하나 없이 그저 큰 목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나 역시 그랬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은 점점 걸음을 옮기며 외쳤다. 열차에서 내리면 어제는 맛보지 못한 맛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이를 위해 이 정도쯤이야 감내할 수 있다. 그런데도 궁금했다. 아무리 소리쳐도 바뀌지 않을 텐데, 왜 이리 열심히 자신들의 의견을 분출할까.

한 정거장 정도 지났을 때 그 사람들은 다른 칸으로 옮겨 갔다. 이렇게 자유롭고 살기 좋은 세상인데, 더 바랄 것이 있을까. A는 몇 정거장 더 지나서 내린 후 버스를 갈아탔다. 마지막으로 버스만 타면 이제 어제 그 공항에 도착한다. A는 창문을 보다가 앞에 사람이 들고 있는 한 신문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린 로라, 애인 찰리 어기. 실은 트렌스젠더’ 당연히 남자와 사귀고 있던 줄 알았던 린 로라의 남자친구가 사실은 여자에서 남자로 성전환 수술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내용을 다루고 있는 기사이다. 신문을 읽고 있었던 나이 든 사람은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말세야, 말세. 익숙한 반응이다. 그들을 향한 시선은 아직 어디를 가도 비슷하구나.

A는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공항 주변을 걸었다. 어제는 보이지 않았던 다양한 음식점들이 눈에 보였다. 여러 곳을 살피다가 간단한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는 가게로 들어갔다. 이미 음식을 먹고 있던 손님들이 말했다.

“[오늘 B 작가 사인회 있던데, 얼굴 처음으로 보여 주네.]”

“[데뷔 이후 처음이래.]”

“[여자라는 말이 있던데.]”

“[나는 남자라고 들었어.]”

A는 본의 아니게 둘의 대화를 들었다. B 작가의 성별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다. 그 작가의 글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A는 기분 좋게 샌드위치를 다 먹고, 후식으로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를 마시며 오후 8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사인회 한 시간 전 A는 자리에서 일어나 슬슬 서점으로 걸었다. 이미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더 늦었다가는 정말 뒤에 섰을 듯싶었다. 직원은 줄을 선 사람의 신작 구매 여부를 확인했다. 곧 B 작가의 모습이 보였다. 앞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여자라고 했는데, 남자네. A가 서 있던 줄에서는 작가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기에 허리를 옆으로 굽혔다. 정말 남자다. 나 역시 B 작가가 여성인 줄 알고 있었다. 문체 부분으로 봤을 때도 여성 작가 느낌이 나서. 뭐 남자면 어떻고, 여자면 어때. 그 작가를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지. A는 가방을 고쳐 맸다.

곧 A의 차례가 되었다. B는 A와 눈을 맞추며 미소를 지은 채로 이름을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A에요.]’

B는 내가 건넨 자신의 책에 내 이름을 적었다. 이름을 적으며 B는 내게 물었다.

“[동양적인 이름인 것 같아요.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A의 눈이 크게 떠졌다. 더군다나 말을 더듬었다. 아임, 아임. A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B는 고개를 들어 A와 다시 눈을 맞췄다. 긴장했다는 티가 심하게 났다. 이 사람이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B는 A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내 표정 하나하나에 놀라는 A의 모습이 재밌었다. 더 보고 싶었다.

“[한국에서 왔어요.]”

이제야 진정이 되었던 A는 천천히 작가에게 말했다. B는 여전히 붉어져 있는 A의 두 뺨을 봤다. 그리고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사인해 준 부분 혼자서만 봐요. B의 말에 A는 네,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인사를 하고 줄에서 나왔다. A는 B의 말대로 조심히 사인해 준 부분을 펼쳤다. A는 잠시 동안 책을 덮지 못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그 쪽에게 반한 것 같아요. 오후 10시 이 공항 부근에 있는 디어디너 레스토랑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연락해 주세요.’

그 밑에는 그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A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어쩌면 정말 큰 기회일지도 몰라. A는 B에게 답장을 보냈다.

‘오후 10시에 봬요.’

A는 아직도 빠르게 뛰고 있는 자신의 심장 부근을 어루만졌다.



05

A는 시간을 맞춰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직원은 이름을 물었다. 내 이름을 듣자 일행분이 기다린다며 나를 안내해 주었다. 직원과 함께 걸어간 곳에는 B 작가가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B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가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빼 주었다. 감사합니다, 하며 의자에 앉았다. A는 지금 이 상황이 어색해서 B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계속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B는 그런 A가 귀여운 듯 미소를 보였다. A의 두 뺨이 점차 붉어졌다. 어색해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던 A에게 B가 물었다. 갑자기 만나자고 해서 죄송해요. A는 두 손을 모두 저으며 절대 그렇지 않았다고 말했다. B는 한 손을 들어 직원에게 메뉴판을 부탁했다. 곧 메뉴판을 권했다. A는 메뉴판에 있는 음식보다는 가격을 살폈다. 영어 간판을 보고 찾아 왔는데 이렇게 값이 나가는 곳인 줄은 몰랐다. A는 조심히 주변을 살폈다. 이제야 눈에 보인다. 알고 있는 브랜드의 이름들이. A는 이중에도 가장 저렴한 음식을 주문했다. 그러자 B는 자신이 계산하니까 괜찮다며 자신과 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둘은 대화를 나누었다. A의 낯가림 역시 금방 가셨다. 곧 음식이 나왔고 B는 A 앞에 놓인 음식을 가져가서 잘라 주었다. A는 허리를 살짝 숙이며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C입니다.]”

“[이리로 모시겠습니다.]”

C는 직원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다랐을 때 멈춰 섰다. 다른 여자와 함께 앉아 있다. C는 A를 본 적이 없다. 처음 보는 여자이다. 가만히 서서 둘을 보고 있던 C는 잠시 고개를 돌렸던 B와 눈이 마주쳤다. B는 아무런 표정 없이 서 있는 C에게 한쪽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A의 입가에 묻은 샐러드 소스를 자신의 엄지손가락으로 닦아 주었다. C는 그런 B를 여전히 아무런 표정 없이 응시했다. 이내 발걸음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B는 언제까지 이럴까. 이번에도 그녀에게 반한 한 사람이 다치는구나.



06

삐삑 띠리리, 익숙한 멜로디가 들렸다. C는 그런 자신의 현관문을 바라보며 소파에 앉았다. 곧 딸깍,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B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C는 미처 말리지 못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말리는 데에 더 급급했다.

“[너 언제까지 이럴 거야.]”

C가 물었다. B는 아무렇지 않게 C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편안해 보였고, 그 자리가 익숙해 보였다. B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예전처럼 돌아갈 때까지.]”

C는 깊은숨을 내쉬더니 이내 머리카락을 닦던 수건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B…. 네가 아무리 다른 여자들이랑 같이 있어도 나는 이제 네가 예전처럼 느껴지지 않아. 벌써 몇 번째야. 도대체 몇 명에게 더 상처를 줘야 그만할래? B 작가의 첫 사인회라고 좋아하면서 온 독자들이 안쓰럽지 않아?]”

B는 대중들 앞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것을 꺼렸다. 출판사의 부탁에도 웬만하면 사인회를 미루고 미루려 했다. 출판사도 이제는 포기했었다. 자신들과 계약해 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겼다. 그랬던 B가 먼저 출판사에 사인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나 역시 놀랐다. 출판사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이유야 어쨌든 돈을 벌어들일 수 있으니까. 나는 물었다. 왜 사인회를 열기로 했냐고. B는 말했다. 나를 사랑해 주는 독자를 만나고 싶다고. 그 말에 나는 안심했다. 이제야 B가 나를 놓아주려는구나. 이제 답답한 이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갇혀 있는 이 기분을 나는 아직도 버릴 수 없다. B는 그저 나에게 보여주며 내 기분을 건드리려는 이유로 사인회를 열었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C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B는 그런 A에게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며 말을 이었다.

“[한국에서 유학 온 A 씨야. 그림을 그린대. 너도 봤으면 알 거야. 되게 귀여워.]”

C는 아까 전 보았던 A 씨의 모습을 떠올렸다. 홍조가 띤 얼굴, 쑥스러워 보였던 표정. 어쩌면 진심으로 B를 좋아하는 듯했다. 그 짧은 순간에. C는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의 맞은편에서 눈을 감고 쉬고 있는 B를 응시했다. 미안했다. 나 때문에 저러한 모습이 된 것 같아서. 내 책임이 맞았다. 내가 B를 저러한 모습으로 만들었으니까. 이제는 지쳤다. 마냥 미안해만 하기에는 B의 행동이 지나쳤다. 더는 미안하지 않다.

“[아, 나 내일모레 병원 가는 날이야.]”

C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다녀와. B는 기분이 좋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C의 두통은 가시지 않았다. 남아 있는 약이라도 먹어야겠다 싶다. 약을 가지러 걸음을 옮기며 다행이네, 말했다.

“[이번 검사만 마치면 이제 이 답답한 생활도 끝내도 돼.]”

서랍을 열던 C의 손이 멈췄다. 답답하구나. 너는 고작 병원에 오가는 생활이 답답하구나. 나는 보이지도 않는 어느 공간에 늘 갇혀 있는 기분인데. C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멈췄던 손을 움직여 마저 약을 꺼냈다. B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07

침대에 앉아 있는 이 공간은 무겁다. 무거운 공기가 자욱했고, 내 어깨를 짓눌렀다. 답답해. 의사는 무표정으로 나를 기록했다. 그리고는 내게 그 종이를 내밀었다. 서약서. 어디를 가도 이곳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담긴 서약서. 펜을 집었다. 차가웠다. 내 이름 옆에 내 이름을 다시 적었다. 빠르게 적었다. 이 차가운 펜을 놓고 싶어서. 내 사인이 마무리되는 순간 의사는 펜 심을 넣고 내게 물었다.

“[수술 후 가장 먼저 보고 싶으신 분 있으시면 연락해 드릴게요.]”

의사가 물었다. B가 말했다. C에게 연락해 주세요. B는 간호사에게 말했다. C에게 연락하라고.




C는 급하게 병원으로 갔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그저 장난으로 속인 것이라고 말해도 괜찮으니까 부디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불현듯 며칠 전 B의 말이 떠올랐다. 차라리 내가 남자가 되면 우리는 편하게 같이 있을 수 있을 텐데. 지나가는 말이겠거니 하고 개의치 않았다. 왜 그랬을까. 지금도 충분히 좋아, 라는 말이라도 해 줬어야 했다. 그 순간을 후회했다. 나는 과연 남자가 된 B를 아무렇지 않게 마주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B와 마주했다. 나의 B였지만 더는 내가 알던 B가 아니었다. 낯설었다. B 특유의 따뜻함도 남아 있지 않았고, 편안한 목소리도 사라졌다. 그저 얼굴만 B와 조금 닮은 남자에 불과했다. 내가 이렇게 만들었다. 내가 B를 망쳤다. 나는 남자가 된 B를 예전처럼 마주할 수 없다.

C는 울었다.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를 온기 하나 남아 있지 않은 남자의 모습으로 만든 것에 대한 죄책감이 가시지 않았다. C는 무너졌다. 만날 때마다 이 죄책감이 터질 것 같았다. B를 마주하기 힘들었다. 내가 사랑한 사람은 이런 모습의 B가 아니었다. 그 자체로 어여쁘고 눈부셨던 B이다. C는 연신 B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다. 그런 C에게 B는 말했다. 이제 우리는 편하게 사랑할 수 있어. 합법적으로.





사람들은 B와 C를 더는 의심하지 않았다. 나라에서 정한 사랑의 정의를 잘 따르고 있었고 누가 봐도 둘은 합법적이었으니까. 손을 잡아도, 가까이 붙어도 아무도 나무라지 않았다. 이제는 숨어서 만날 필요도 없었다. 법으로 규정한 사회적 성별을 지켰다는 자체로 자유로워졌다. B는 자유로웠다.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사랑한다는 그 자체로 자유로웠다. C는 어딘가 B가 낯설었다. 나로 인해 이런 결정을 내렸으니까 B를 사랑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노력했다. 충분히 노력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B에게서 괴리감이 느껴졌다. 더는 B와 있어도 행복하지 않았다. 애써 외면했던 사실을 받아들였다, 나는 더 이상 B를 사랑하지 않는다.

B에게 말했다. B야, 미안해. 나는 예전의 너를 더 사랑해. 예전의 네가 그리워. B가 되물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냐고. C의 눈시울이 서서히 붉어졌다. 그리고는 말없이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B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화도 나지 않았다. 고요했다. 아무런 기분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남자가 된 이유가 C였는데, 이 이유마저 사라지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무슨 이유로 이제 살아야 하지. B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미안해. 나는 너를 놓아줄 수 없어.




B의 얼굴은 예뻤다. 남자가 되어서도 여자들이 좋아하는 얼굴을 가졌다. B는 다른 여자들을 만났다. 그 모습을 늘 C에게 보여주었다. C는 그런 B의 모습에 지쳤다. 그런데도 연락을 받고도 B를 만나러 가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B에게도 여지를 남겨주는 것 같아서 더 불편했다. 그 불편함은 번지고 번져서 나 스스로를 가뒀다.

C는 괴로워하며 B에게 호소했다.

제발, 이제 나를 놓아줘.



08

A는 B 작가와 밥을 먹던 기억을 틈만 나면 떠올렸다. 이모는 그런 A에게 물었다.

“사인회가 그렇게 재밌었어? 그때 이후로 더 밝아진 것 같아.”

이모의 말에 A는 애써 입꼬리를 내리며 네, 라고 대답했다. 이모는 물을 마시고는 겉옷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A야, 이모 다녀올게. 이따가 집에서 보자.”

“네, 다녀오세요.”

이모는 오늘도 즐겁게 보내라는 말을 건네고는 집을 나섰다. A는 B와의 만남을 잊지 못했다. 그리고 이모에게 말하지 못했다. B와의 사이를.




저녁을 다 먹고 B는 A를 데려다주기 위해 같이 길을 걸었다. A는 B와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긴장이 돼서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B는 그런 A를 봤다. 표정에서부터 느껴졌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그리고 알았다. 나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B는 A에게 물었다.

“[왜 내 글이 좋아요?]”

A는 갑작스러운 물음에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섬세한 문체가 좋아요. 번역본으로 읽어도 느껴지는데 원어로 읽으면 얼마나 더 좋을까, 라는 마음이 들게 해 준 첫 번째 책이 작가님의 책이었어요.]”

B는 A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내 처음 들어보는 이유였다. 어쩌면 이번에 A와 만난다면 C에게 약간의 불안감이라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B는 걸음을 멈추더니 A의 이름을 불러 멈춰 세웠다. B는 멈춰 있는 A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사실 내가 A 씨에게 저녁 약속을 했던 이유는 지금 A 씨와 가까워지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였어요.]”

A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B와 눈을 맞춘 채 그의 말을 들었다.

“[너무 갑작스럽지만, 나랑 만나 볼래요?]”

A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B는 그런 A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요. 내가 무례했던 것 같아요. 마저 데려다줄게요. B는 다시 A를 데려다주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 몸을 움직였다. A는 그런 B의 이름을 불렀다. B는 A의 목소리에 다시 걸음을 멈추고 몸을 틀었다.

“[한국에 있을 때 저는 늘 타인의 눈치를 살피며 살았어요. 단 한 순간도 제 마음 가는 대로 무엇을 해 본 적이 없어요. 여기서는 그러지 않을래요. 많이 놀랐지만, 여기서는 제 마음이 가는 대로 해 볼래요. 우리는 서로 아직 아는 게 없지만, 저도 작가님과 만나면서 천천히 알아 가고 싶어요.]”

A는 B에게 자신의 한 손을 내밀었다. B는 조금씩 걸어오더니 A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는 A를 자신의 품에 안았다. C가 떠올랐다. 이번에는 C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까, 싶었다. A는 B를 껴안았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한 적은. 처음으로 느껴본 자유였다.



09

B의 집은 차가웠다. 그런데도 이 공간이 환해 보였다. B가 있어서 그런 듯하다.

“[뭐 하고 있었어요?]”

B는 집 벽에 손을 갖다 대고 있는 A에게 물었다. A는 손을 댄 체 B에게 집이 따뜻하네요, 라고 말했다. B는 소파에 앉으며 A를 불렀다. 앉아서 커피라도 마셔요. A는 창문 밖을 잠시보다 이내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뜨거웠던 탓에 A는 식히기 위해 호호, 숨을 불었다. B는 그런 A의 눈을 찌를 것 같던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삐삐삑 띠리릭, 잠금장치의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A는 고개를 들어 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들어왔다. 화난 표정이었다. A는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B를 바라봤다. B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커피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는, A 씨 처음 만나지? 라고 말했다. A는 아무런 말 없이 서 있는 이름 모르는 여자와 B를 번갈아 쳐다봤다.

“[B, 이번은 도가 지나쳤어. 내가 다시 오기 전까지 모두 정리해 놔.]”

여자는 자신의 화를 최대한 가라앉히려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A는 B에게 물었다. 저 여자분은 누구예요. B는 커피를 마저 마시며 말했다. 내 여자친구 C에요. 목소리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A는 그런 B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A는 자신의 겉옷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B는 그런 A에게 물었다. 무슨 선택을 하든 이해할게요. A는 대답하지 않고 집 밖으로 나갔다.

A는 급하게 걸으며 C를 찾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수도 없었다.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갔다. C의 뒷모습이 보였다. A는 뛰었다. 그리고 그녀 앞에 멈춰 섰다. C는 아무런 표정 없이 A를 응시했다.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한테 할 말이 있나요. A는 숨을 조금이라도 고른 후 말했다. 얘기를 나누고 싶어요.




둘은 마주 앉았다. C는 A에게 뭐라도 물어봐요 다 얘기해 줄게요, 라고 말했다. A의 눈시울이 점차 붉어졌다. C는 남자가 된 B를 처음 마주했을 때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러웠다.

“[B는 당신과 만나면서 저를 만난 건가요?]”

C는 쉽사리 답할 수가 없어서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내 깊게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다 해주는 게 A 씨에게 더 좋을 것 같네요.]”

C는 처음으로 B에 관한 얘기를 타인에게 털어놓았다.



A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C 역시 A에게 해 줄 수 있는 위로가 없었다.

“[죄송해요, 저 먼저 일어나 볼게요. 죄송해요. 그리고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A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쉽사리 일어나지 못했다. A는 자신의 두 팔로 몸을 지탱하며 일어났다. 그리고는 C에게 인사를 하고 카페를 나섰다. C는 이번만큼은 후회하지 않았다. B의 얘기를 타인에게 말한 것에 대해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곧 C도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밖으로 나갔다. 한 입도 데지 않은 커피잔만 덩그러니 남았다. 식어버린 탓에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비가 내렸다. A는 그 속을 걸었다. 예고 없이 내린 비 탓에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았다. 걸었다. 그에게 가기 위해, 계속 걸었다. B의 모습이 보였다. 카페와 그리 멀지 않은 횡단보도의 끝에서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그를 보기 위해 이 빗속을 걸었는데, 막상 그를 만나니 기쁘지 않았다. 곧 신호가 바뀌었다. A는 멈췄던 걸음을 다시 걸었다. B와 만났다. B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겉옷을 A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평소보다는 커진 목소리였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걸어왔어요.]”

A는 고개를 들어 먹먹한 목소리로 B에게 물었다. 나를 정말로 사랑하기는 했나요. B는 다른 말을 했다. 우선 어디라도 들어가서 몸을 말리자고. A는 그런 B의 손을 밀치며 되물었다.

“[지금 대답해요. 나를 사랑한 적이 있나요?]”

당신이 원래는 여자였고, 지금은 남자라고 해도 나는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이 나를 사랑했다는 사실이 나한테는 더 중요해요. 울부짖는 A에게 B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A는 조금이라도 더 B의 대답을 기다리고 싶었다. 하지만 들을 수 없었다. B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내 두 팔을 잡고 있었다. 어떠한 떨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B는 나를 진심으로 대했다. 아무런 감정 없이 그저 지나가는 여자 한 명의 불과하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그 감정으로. 그 감정이 그의 진심이었다. A는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으며 터지는 울음을 막으려 애썼다.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A는 그의 우산으로부터 나와서 다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걸었다.

어긋나는 시술을 통해 남자의 몸이 되었다는 것은 A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진심이 사랑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더 슬펐다. 처음으로 가져 본 나의 자유였고, 처음으로 표현한 나의 의지였다. 내 자유는 본래 내 것이 아니었고, 내 의지는 꺾였다. 나는 다시 갇혔다. 나라가 정한 사랑이라는 정의에 갇히고야 말았다. 나는 내 자유를 잃었다.

A의 손목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나는 내 손목으로 시선을 옮겼다. 누군가의 손, 고개를 들어 그 손의 주인을 마주했다. B였다. 여자인 B의 모습. A는 눈을 비벼 빗물을 떨쳐내었다. 남자인 B가 그 손의 주인이었다. 우산이라도 가져가요. B는 A의 손에 자신이 들고 있던 우산을 쥐여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걸어갔다. A는 그가 준 우산을 바라봤다. 손잡이에는 아직 그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A는 다시 걸었다. 그 우산을 쓰고.

보라색의 옷을 입은 사람이 보였다. 비가 쏟아지는 지금도, 그 사람은 자유를 외치고 있었다. 정해진 사랑의 정의에 대한 탈피를 원하고 있었다. 이 비를 온전히 맞으며. A는 그 사람에게 가까이 걸어갔다. 들고 있던 종이에 쓰여 있는 문구를 다시 읽었다.

‘사랑의 형태는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정해지는 것입니다. 결코, 세상이 정의할 수 없습니다. 결코, 법으로 규제될 수 없습니다.’

A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이내 A는 그 사람에게 자신이 들고 있던 우산을 내밀었다. 그 사람은 우산을 받아 들고는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했다. 손잡이에 남아 있는 나의 온기가 조금이라도 자유를 외치는 사람에게 전해져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비를 맞아야겠다. 아직도 남아 있는 B에 대한 마음이 씻어내기 위해 비를 맞아야겠다. 비의 차가움을 맞이해야겠다.




B는 비를 맞으며 걸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내가 이렇게 슬퍼했던 적이 있을까. A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그녀를 사랑할 이유가 없었다. 단지 나는 C의 마음을 다시 얻기 위해 잠시 만난 것뿐이니까. 그 이유뿐이었는데 나는 왜 이리도 슬플까. 사랑한 적이 없었냐는 A의 물음에 나는 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을까. 아니, 사랑한 적 없다는 대답조차 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설마 내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한 것인가. 아니야. 그럴 일이 없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C야. 내가 불법으로까지 남자가 된 이유도 C 때문이잖아.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불편해하던 너를 위해 남자가 된 거야.]”

C는 애써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는 단 한 번도 불편하지 않았어. 사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불편했던 건 너야. 오히려 그런 너를 내가 불편해했고. 그래서 너에게 계속 미안해했어. 너는 나를 위해 남자가 된 게 아니야. 너를 위해 남자가 되려 했던 거야. 그러니, B야. 이제 나를 놓아줘. 그리고 A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B는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이 느껴졌다. 곧 터지고야 말았다. B는 울었다. 그리고 알았다.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이 A였다는 것을. 사실 C와의 만남을 꺼렸던 사람은 자신이었다는 것을. C는 그런 B를 안아 주었다.



10

A는 방송을 봤다. 호모 사피엔스 단체를 지지한다는 뜻을 말하고 있는 B의 모습이 보였다. A는 미소를 지었다. 건강해 보였다. B는 자신을 고백했다. 성전환 수술을 했던 자신에 대해서. 신작 ‘흰동가리’ 역시 그런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라고. 일정한 때가 되면 수컷은 자신의 성별을 바꿀 수 있다. 성별을 바꾼 자신의 모습이 마치 흰동가리 같아서 글을 썼다고 말했다.

“저 작가 트렌스젠더였네. 대단하다, 고백하기 힘들었을 텐데.”

같이 방송을 보고 있던 이모가 말했다. A 역시 이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멋진 것 같아요.”




오랜만에 만나네요. 더 멋있어진 것 같아요.

A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B에게 말했다. 오랜만에 본 얼굴. 조금 살이 빠진 것 같기도 했다. B의 연락이 왔을 때 A는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B의 말은 듣고 싶었다. 무슨 말이든. 얘기는 들어보고 헤어지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 만나러 나오길 잘한 것 같다.

A 씨도 좋아 보여요. 만나 줘서 고마워요.

너무 갑자기 헤어졌잖아요.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어요. 할 말이 있어서 만나자고 했죠? 다 들어 줄게요.

B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A 씨 덕에 나 자신과 마주할 수 있었어요. 사실 그런 만남을 꺼린 사람은 나였어요. 그래서 수술을 했어요. 나 스스로가 떳떳하지 않았어요. 떳떳하다고 오해하고 있었어요. 당연히 A 씨를 사랑하지 않는다고도 오해했어요. A씨가 간 후에야 알았어요. 제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A 씨에요. 미안해요, 너무 늦게 말해서. 너무 늦게 깨달아서 너무 미안해요.

진심으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B의 모습에 A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여자의 모습인 B가 자신의 앞에 앉아 있었다. 나는 과연 어떨까. 나는 B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B 자체를 사랑할 수 있을까. A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







<< 작품 ‘흰동가리’ 해석 >>

영화 '랍스터'를 보고 쓴 소설이다. 과제로 쓴 소설이다.


저는 영화 ‘랍스터’를 보며 사랑의 정의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반드시 짝이 되어야 한다는 영화의 설정을 활용하여 나라에서 정한 사랑의 정의를 주제로 삼았습니다.

영화에는 국가에 의해 짝이 되기 위해 단체로 호텔로 들어가는 설정이 있습니다. 저는 이를 활용하여 국가에서 정한 사랑에 관한 법을 생각했습니다.

랍스터로 만들어 달라던 주인공이 호텔에서 탈출하는 모습을 보고 정해진 틀에서 탈피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떠올려 이를 시작으로 국가에서 정한 법을 어기는 시도를 하는 등장인물들을 설정했습니다.

눈이 먼 여자를 변함없이 사랑하기 위해 자신의 눈에 칼을 갖다 대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고 주인공 역시 결함이 있는 사람 앞에서 주춤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느낌을 통해 동성애를 자신도 모르게 결함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주인공을 만들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자신의 눈을 찌르는 것에 머뭇거리던 모습으로 영화가 끝남으로써 깊은 여운이 느껴졌습니다. 이러한 영화의 결말을 활용하여 저 역시 열린 결말로 글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알파벳으로 정한 이유는 이름으로부터 오는 그 사람 특유의 느낌을 정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름으로부터 오는 느낌이 글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을 한정 짓지 않을까, 우려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이를 통해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제한하고 싶지 않았던 것을 나름대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성별을 바꾸는 ‘흰동가리’의 속성과 주인공 B는 닮았습니다. 은유적으로 글을 표현하기 위해 제목을 ‘흰동가리’로 정했습니다.

B가 우산을 건네는 장면을 통해 정해진 사회를 탈피하는 사람들을 응원하는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자신의 성전환 수술 사실을 고백하던 B의 모습을 보고 대단하다, 라는 이모의 말을 통해 인식이 바뀌는 사람들이 있음을 표현했습니다. 이를 통해 비난할 마음은 없다, 그렇다고 권장할 마음도 없다, 존중을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C가 B를 안아 주는 장면을 통해 규칙을 탈피하려는 과정에서 주변에 상처 준 사람들과의 화해를 표현했습니다.

전부터 써 보고 싶었던 소재였습니다. 중편 소설로 계획했지만, 단편으로 써 보며 이야기의 흐름을 틀을 잡는 데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가벼운 소재가 아닌 만큼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마주한다는 설정을 포함하고 싶었습니다. B가 뒤늦게 자신이 동성애에 대해 어떤 마음이었는지 인정하며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을 통해 이를 표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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