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선란, 옥수수밭과 형
What if?: 만약 우리 형이 옥수수밭에서 출렁이는 옥수수들처럼 계속해서 나타난다면?
Why this?: 하나 뿐인 형이 사라지고 다른 형이 나타나고 또 다른 형이 나타난다. 대화 외에는 변변한 사건도 없이 형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야기, 너무 식상하지 않냐고? 천선란 작가님이 쓰면 전혀 그렇지 않다. 마음을 울린다. 나는 어느새 옥수수밭 한가운데 가 있다. 형을 추억하고 형을 기다리면서...
형이 다니는 대학에 도착했다. 형은 도서관 로비에 서서 전자책을 읽고 있었다. 첫 번째 형이 입던 하늘색 체크 남방을 입은 채로. 옥수수밭에 피크닉 매트에 앉아 책을 읽던 형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방해하고 싶지 않아 형 곁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형이 날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미소는 형의 것이 맞았다.
우리는 캠퍼스 카페테리아에 자리를 잡았다.
“형, 그 말 기억나?”
나는 질문을 하며 형의 발목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혹시나 숫자가 바뀌었을까 봐. 다행히 발목에 9가 쓰여 있었다. 여전히 세 번째 형이었다.
“무슨 말?”
“이 끝의 옥수수와 저 끝의 옥수수가 똑같아 보이더라도 기억이 다르면 다른 옥수수라고 했던 거.”
“푸코,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기억이 다른 형이 또 나타난다면...”
나는 포크로 스프 접시를 톡톡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혹시 내가 떠난 동안 또 다른 형이 나타난 적은 없었니?”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뗐다.
“있었어.”
“옥수수밭에서?”
“응.”
“그 형이 나를 찾지 않았어?”
“모르겠어, 난 그냥 도망쳤거든.”
“잘했어, 내가 네 형이니까, 푸코에게 더 이상의 형은 필요 없잖아.”
“형 이제는 안 아플거지?”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카페테리아 앞 푸른 잔디밭을 걸었다. 형은 대학에서 배우고 있는 것에 대해 말해주었다. 유전자와 호르몬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목소리 톤이 평소보다 훨씬 높아서 들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만간 우리는 질병을 정복하게 될 거야.”
나는 형이 말하는 것을 모조리 기억할 수 있었지만,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기억과 이해는 다르니까. 설명이 점점 어려워져 머리를 긁적이다가 문득 형에게 주려고 가져왔던 선물이 생각났다. 챙이 넓은 모자, 형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형, 나 잠깐 식당에 다시 갔다 올게.”
“왜? 뭐 놓고 왔어?”
“응, 여기 잠깐만 기다려.”
카페테리아에 들어선 순간,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나와 형을 똑 닮은 형제가 창가에서 마주 앉아 즐겁게 웃으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평행 우주가 존재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식사를 하던 또 다른 내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움찔하며 포크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챙-하는 금속음이 공기를 갈랐다. 나는 그들의, 그들은 나의 발목을 쳐다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옥수수밭 한 가운데에 서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옥수수가 파도처럼 나를 덮친다. 현기증이 몰려왔다.
내 볼에서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끝>
Why not?: ‘형의 복제’에서 ‘우리의 복제’로 상상력을 넓혀봤다. 또 다른 나를 마주하는 느낌은 어떨까, 매혹적이면서 두려운 상상이 옥수수밭처럼 출렁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