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적 토론으로 가는 다섯 가지 조건
“계급장 떼고 자유롭게 토론해 봅시다.”
회의나 워크숍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 말은 토론이 활발한 수평적 문화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발언이 소수에게 쏠리고 다수는 침묵한 채, 회의가 결론 없이 끝나는 경우가 많다. 좋은 의도로 시작했지만 실망스러운 결과로 끝나는 장면은 많은 조직에서 반복된다. ‘자유롭게 토론하자’는 말은 깨어 있는 말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소수의 발언 위주로만 흐르기 쉽다. 이유는 단순하다. 토론의 구조와 규칙이 없기 때문이다. 토론은 단순히 의견을 나누는 자리가 아니라, 목적과 절차가 분명해야만 건설적인 토론이 이뤄질 수 있다.
토론의 출발점은 공동의 목표다. 목표가 없으면 사람들은 각자 옳음을 증명하려 들며 말싸움으로 빠지게 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고 주장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신제품을 예정된 12월에 출시하려면, 어떤 우선순위를 조정해야 할까?”나 “우수 인재의 이직률을 내년까지 절반으로 줄이려면 어떤 제도 개선이 필요할까?”처럼 목표가 분명하다면 논의는 자연스럽게 해결책을 향해 정리된다. 목표는 토론의 나침반과 같다. 바람이 거세고 파도가 흔들려도 나침반이 있으면 배가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듯, 토론도 격렬한 대립 속에서도 다시 본래 논점으로 돌아올 수 있다.
다만 목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목표가 있어도 규칙이 없으면 발언은 소수에게 쏠린다. 발언 시간과 순서, 질문과 답변의 역할, 최종 의사결정 방식 같은 장치가 없다면 일부만 발언을 독점하고 다수는 침묵한다. 규칙은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목소리를 균형 있게 들리게 하는 일종의 안전장치이다. 단순해 보이지만 이런 장치가 있어야 토론은 검증의 장으로 작동한다.
규칙이 있어도 리더(또는 회의·토론 진행자)가 눈치를 주거나 특정 의견만 편들면 토론은 활력을 잃는다. 리더가 결론을 미리 정해두거나 특정 의견만 지지하면 참여자들은 위축된다. 반대로 리더가 반대 의견을 환영하고 다양한 시각을 독려할 때 사람들은 심리적 안전감을 느낀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발언이 무시되거나 불이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자유로운 토론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리더라면 자신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토론 바깥에서는 최종 결정권자일 수 있지만, 토론 안에서는 더 많은 대화를 촉진하는 중재자여야 한다. 자신의 지위나 권한이 발언을 압도하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물러서야만,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자유롭게 드러난다.
또한 리더는 ‘말을 꺼내면 곧 책임이 되는’ 부담감을 덜어주어야 한다. 많은 조직에서 직원들은 의견을 내면 그 순간 실행 책임까지 떠안을까 두려워 입을 닫는다. 그러나 토론은 아이디어를 검증하는 자리이지, 곧바로 실행을 떠넘기는 자리가 아니다. 리더가 “여기서는 누구든 자유롭게 아이디어와 가설을 나눌 수 있고, 실행 여부는 별도의 단계에서 정한다”는 점을 분명히 할 때 비로소 다양한 의견이 나오기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이 토론은 ‘논리를 겨루는 활동’이라고 인식하고 이에 따라 상대 감정을 무시하고 논리에만 집중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토론 방법이라고 여기곤 한다. 정말 그럴까? 토론은 논리만으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상대의 감정을 존중하지 않으면 방어 본능이 작동해 논의가 감정싸움으로 변질된다. 강한 정치적 신념을 가진 사람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들조차 반박만 들어도 뇌는 이를 위협 신호로 감지하고 방어 기제를 작동시킨다는 점은 여러 연구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공격적인 말투나 무례한 표현이 합리적 대안 검토를 막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감정을 존중하는 것은 단순한 예의 문제가 아니라 정보 처리의 품질과 의사결정의 정확도를 높이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를 조직 토론에 적용하면, 단순히 얼마나 날카롭게 반박했는가뿐만 아니라, 상대가 위협을 느끼지 않으면서 검증의 장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드는 표현 방식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열띤 논의가 이어졌다고 해서 건설적인 토론인 것은 아니다. 실제로 많은 회의가 열띤 토론 끝에 결론이나 다음 단계를 정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난다. 중요한 것은 모든 사안을 한 번에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합의 가능한 최소한의 다음 단계를 남기는 것이다. 무엇을 당장 실행할지는 미정으로 남겨둔다고 할지라도, 무엇에 대해 먼저 의사결정을 내릴지, 어떤 기준으로 검토하고 우선순위를 매길지와 같은 작은 합의만 있어도 토론은 앞으로 나아간다. 서로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 논의의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다수결로 할지, 최종 책임자가 판단할지, 제삼자에게 중재를 맡길지 등 최소한의 의사결정 장치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토론이 지엽적인 쟁점에만 머무르지 않고 실제 의사결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토론은 단순히 한다고 해서 저절로 건설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토론의 목표가 분명하고 모두가 이 목표를 인식한 상태에서 토론을 촉진하는 규칙과 리더가 있고, 결론을 내릴 절차가 있을 때 성공적인 토론을 할 수 있다. “직급에 상관없이 계급장 떼고 편하게 이야기해 보라”는 말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자유로운 토론이 독이 되지 않으려면 선언이 아니라 설계가 필요하다. 목표·규칙·리더십·절차가 갖춰질 때 토론은 비로소 힘을 발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