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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되는 토론대회에서 성장하는 토론대회로

대한민국 토론, 심사와 논제 설계는 왜 다시 짜야 하나

by 이주승

이제 토론대회는 특별한 행사가 아니다. 교육청, 지자체, 대학, 공공기관까지 전국 각지에서 꾸준히 열린다. ‘민주시민 양성’과 ‘소통 역량 강화’ 같은 구호는 넘쳐나고, 형식도 전통적인 방식부터 아이디어 공모전과 결합한 하이브리드 토론까지 다양하다. 청소년과 청년이 사회 현안에 목소리를 내고, 낯선 이와 논리를 겨루는 장이 많아진 것은 분명 긍정적이다.


이 많은 토론대회가 참가자와 사회에 무엇을 남기고 있을까?

단순히 “좋은 경험이었다”는 말 외에, 참가자가 실제로 성장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을까?

아쉽게도 많은 대회가 토론을 문화로 키우기보다 일회성 행사로 소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대회에 참여한 학생이나 청년들에게 많이 듣는 후기는 “왜 졌는지 모르겠다”, “오랜 기간 준비한 내용에 대해 피드백을 들을 수 없어 아쉽다”는 반응이다. 이들이 메타인지가 부족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단순한 분함이나 아쉬움이 아니라, 대회 운영 구조에 숨어 있는 결함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주최 기관의 내부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나 역시 여러 대회를 운영해 왔기에 이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꺼내는 이유는, 주최 측이 참가자 입장에서 조금만 더 고민한다면, 우리는 함께 더 나은 토론 문화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심사와 논제 설계만 바꿔도, 대회는 모두가 성장하는 경험이 될 수 있다. 지금 바꿔야 할 것은 단지 참가자 수나 대회 규모가 아니다. ‘어떻게 심사하고, 어떻게 피드백하며, 어떤 논제를 고민하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철학이 운영 전반에 녹아야 한다.


심사 교육이 토론의 질과 경험을 결정한다.


토론은 서로의 논리를 비교·검증하며 청중을 설득하는 과정이다. 대회에서는 청중을 대신해 심사위원이 그 설득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를 논리적으로 판별한다. 문제는, 많은 대회의 심사가 여전히 주관적 인상 평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말은 참 잘한다”, “(대)학생답지 못했다”와 같은 평은 참가자가 무엇을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핵심 논점이 무엇이었고, 양측이 그 쟁점에 어떻게 접근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심사평이 아니라 단순한 감상일 뿐이다.


이 문제를 심사위원 개인의 자질 부족으로만 볼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심사 기준과 교육 시스템이 부재한 구조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과거 오산시 전국학생토론대회는 이 점을 제도적으로 보완했다. 심사자에게 15시간의 연수를 의무화하고, 시범 토론에 대한 실전 평가를 거쳐 교육 후 테스트를 통해 A~E 등급으로 분류한다. 실제 대회에서는 경기마다 상위 등급의 심사자가 반드시 포함되도록 배정된다. ‘누구나 심사할 수 있다’는 관행을 버리고, ‘훈련된 사람만이 심사한다’는 원칙을 도입한 사례다. 이는 해외 유수 토론대회에서도 오래전부터 정착된 방식이다. 유명하다고, 경험이 많다고 해서 자동으로 심사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누구나 사전 심사 테스트를 거쳐야 하며, 기준 미달이면 초반에는 투표권 없는 심사자(trainee)로 참여하게 된다.


물론 내부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고려하면 모든 대회가 이런 과정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러나 최소한 압축된 사전 교육과 간단한 역량 평가는 도입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토론 경험이 적은 심사자도 기본 심사 역량을 갖출 수 있고, 심사의 신뢰도 역시 높아진다. 축구 경기에도 정식 심판 교육과 규칙 해석 기준이 있듯, 토론도 심사자가 기준과 절차를 충분히 숙지하고 훈련받아야 한다. 이런 과정이 선행될 때 비로소 토론대회는 공정하고 성숙하게 진행될 수 있다.


심사평은 선택이 아니라 심사위원의 책임이다.


많은 토론대회가 결승전 외에는 심사평을 생략한다. 결과만 발표되는 대회에서는 배움이 멈춘다. 참가자는 승패를 알지만, 그 이유와 맥락을 모른다. 여기서 좋은 심사평이 무엇인지 짚고 넘어가면, 좋은 심사평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다. 심사자가 어떤 판단 과정을 거쳐 결론에 도달했는지를 설명하고, 그 판단을 참가자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과정이다. 어떤 쟁점이 핵심이었는지, 각 팀이 그 쟁점을 어떤 논리로 접근했는지, 설득력의 강약을 가른 요소는 무엇이었는지를 분석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예를 들어 “찬성 측은 정책 변화로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고 주장했으나, 반대 측은 그 전제가 성립하지 않는 상황을 지적했고, 이에 대한 설득력 있는 반박이 부족했다.”와 같은 이런 비교·분석이 포함돼야 한다.


반면 단순히 좋은 점과 개선할 점을 나열하는 것은 제대로 된 심사평이라고 보기 어렵다. 예를 들어, “자료 정리를 잘했다”, “본인의 이야기를 더 해보라”는 식의 피드백은 불명확하고 해석의 여지가 많아 교육적 효과가 떨어지고, 판단 근거도 명확하지 않다.


이렇게 심사평이 의무가 되면 심사위원도 책임감이 커진다. 기록하고 설명해야 하니 더 집중해서 듣고, 판단도 신중해진다. 토론자가 심사위원을 설득하듯, 심사위원도 자신의 승패 판단을 참가자에게 납득시켜야 한다. 실제로 세계 토론대회에서는 심사위원도 평가의 대상이 되는데, 매 경기 후 참가자와 동료 심사위원이 익명으로 심사를 평가한다. 이 구조야말로 토론을 일방적 판정이 아닌 상호 학습의 장으로 바꾸는 핵심이고, 이렇게 될 때야 여러 논리와 대안을 우리 모두 더 면밀히 검증할 수 있게 된다.


논제는 생각의 폭을 넓히는 설계여야 한다.


심사 체계가 정비되었다면, 다음은 논제다. 국내 많은 토론대회는 예선부터 결승까지 하나, 많아야 두 개의 논제로 모든 경기를 치른다. 이 방식은 한 주제를 깊이 다룰 수 있고 운영 부담이 적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1~3일 안에 끝나는 짧은 일정에서는 토론이 반복적이고 피상적으로 흐르기 쉽다.


더 깊이 있고 다양한 논의를 만들려면 대회 기간을 늘려야 한다. 지금처럼 한 시즌에 맞춰 1~3일 안에 이뤄지는 구조로는 토론을 거듭해도 그 내용이 진화하기는 어렵다. 실례로 미국의 Policy Debate는 하나의 논제를 다루는데, 대회 기간이 무려 1년이다. 참가자는 매 경기(토론)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논리를 보완할 시간을 충분히 갖고, 이에 따라 토론 내용도 눈에 띄게 진화한다.


한국처럼 기간을 늘리기 어려운 환경이라면, 라운드별 다른 논제를 도입하는 방법이 있다. 예를 들면, 예선에서는 기술 윤리에 대해서, 본선에는 경제와 환경에 대한 이슈 등을 다루는 것이다. 이처럼 층위별로 논제를 구성하면 참가자는 각기 다른 사고 전환을 경험한다. 결과적으로 자료 암기보다는 논리 설계 능력을 키우게 된다. 준비 부담은 늘지만, 교육 효과는 훨씬 크다.




좋은 토론대회는 ‘말을 잘하는 사람’을 뽑는 자리가 아니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 사회 현안을 두고 논리를 비교·검증하며 설득하는 장이다. 동시에 민주적 시민성을 훈련하는 장이기도 하다. 행사로 소비되는 토론은 대회와 함께 사라지지만, 교육적으로 설계된 토론대회는 생각의 훈련장이 된다. 그 안에서 피드백을 통해 성장하고, 시민성은 쌓인다.


대회 하나가 끝났을 때 남는 것이 트로피가 아니라 더 유연한 사고방식과 시민적 대화의 기술이라면, 그리고 토론의 판정을 의도적으로 검증하는 훈련을 경험하는 사람이 한 명씩 늘어난다면, 그때 우리는 비로소 토론을 문화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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