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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겼나요?”라는 질문이 토론을 망친다

승패 중심 사고가 토론을 망치는 이유

by 이주승

고등학생 대상 토론 수업을 참관했을 때였다. 실전 토론이 끝난 직후,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물었다.

“선생님, 누가 이긴 거예요?”


어른들도 다르지 않다.

직장 회의에서, 대선 후보 TV토론을 보면서도 묻는다.

“결국 누가 이긴 거야?”


이 질문은 겉보기엔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질문이 토론의 시작이 아닌, 사고의 종착점이 되는 순간 문제가 생긴다.

토론을 ‘누가 이겼는지’ 중심으로 바라보면, 토론은 사고를 확장하기는 커녕 경쟁 중심의 말싸움으로 전락할 위험이 생기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토론은 정답을 겨루는 싸움이 아니다.

더 나은 답을 함께 찾아가는 검증의 과정이어야 한다.


승패 중심 사고가 만드는 세 가지 문제


승패 중심 사고가 만드는 세 가지 문제.png


1. 결과만 남고 성찰은 사라진다.


토론을 이기고 지는 문제로만 접근하면, 참여자는 과정보다 이기는 전략에 집중하게 된다.

학생은 “주장의 약점은 무엇일까?”보다 “이 말이 먹힐까?”를 먼저 고민하게 된다.

직장인은 “어떤 방안이 더 옳은가?", "조직에 이득이 되는가?”보다 “어떻게 내 안을 통과시킬까?”에만 집중한다.


이 과정에서 사고는 얕아지고, 자기 논리의 타당성을 돌아볼 기회는 사라진다.

동시에 승패에 집착하면, 상대를 꺾는 데만 몰두하게 된다.

더 나은 해법을 함께 모색하는 협력의 장으로서의 토론은 사라진다.


2. 토론을 말싸움으로 전락시킨다.


많은 사람이 ‘토론’이라는 단어에 전투적인 이미지를 덧씌운다.

더 센 말을 하는 사람이 이기고, 더 조리 있게 말한 쪽이 이긴다는 식이다.

하지만 토론은 단순히 말재주로 상대를 꺾는 기술이 아니다.

토론은 다양한 관점과 논리를 꺼내어 서로 검토하고 비교하며, 각자가 청중을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다.


특히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루는 주제에는 절대적 정답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AI 규제를 어느 수준까지 해야 하는가?", "국가가 원자력 발전소를 폐쇄해야 하는가?", "대통령 중임제를 도입해야 하는가?" 같은 질문에는 하나의 관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누구도 이 사안에 대한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없다.

이때 필요한 것이 토론이다.

정답이 없는 주제에 대해 서로 설득하고 검증하면서 상대적으로 ‘공존 가능한 최선’을 찾는 과정이 토론이다.


3. 피드백 없는 구조가 성장을 가로막는다.


그렇다고 해서 꼭 승패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승패 중심으로 토론을 접근하여 명확한 기준 없이 결과만 발표하고, 그 과정에 대한 피드백이 사라지는 구조다.


이런 구조에서는 토론의 결과만 남고, 왜 그 결과가 나왔는지에 대한 학습은 이뤄지지 않는다.

“이겼다”는 말은 남지만, 왜 이겼는지에 대한 이해는 없다.

“졌다”는 결과는 남지만, 다음엔 어떻게 나아져야 할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이는 마치 해설 없는 시험과 같은데, 답은 알려주되, 왜 맞았는지, 왜 틀렸는지는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승패를 완전히 배제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토론을 망치는 것은 '승패 요소'가 아니라 '승패 중심 사고'다.


잘 설계된 토론은 승패를 통해 오히려 동기를 유발할 수 있다.

단, 그 승패가 명확한 기준과 구체적인 피드백에 기반하여 결정될 때만 그렇다.


실제 교육 현장을 보면, 문제는 ‘승패가 있는 토론’이 아니었다.

많은 경우, ‘구체적이고 건설적인 피드백 없이 승패 결과만 남는 토론’이었다.

승패만 있는 토론은 학생들이 결과에만 집중하도록 한다.

반대로 어떤 논점이 설득력을 얻었는지, 어떤 논리가 약했는지를 피드백해주면, 학생들은 졌더라도 "나는 성장했다."고 느낀다. (따라서 교수자라면 학습자가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할 수 있도록 피드백과 평가를 설계해야 한다.)


좋은 토론은 무엇을 남기는가


정리해보자. 모든 토론에 승패를 가를 필요는 없다.

반대로, 승패가 있다고 해서 그 토론이 반드시 나쁜 것도 아니다.

핵심은, 그 토론이 참여자의 사고를 확장시키는가이다.

각자가 얼마나 진지하게 논리를 세우고 상대를 이해하려 했는가이다.


좋은 토론은 끝나고 나서 이런 질문을 남긴다.

“이번에 이겼나?“가 아니라

“나는 어떤 논리를 새롭게 이해했는가?”

“나는 상대를 어떻게 더 깊이 이해했는가?”

“이번 토론에서 나는 어떤 점이 더 나아졌는가?”라는 질문이다.


토론은 말싸움이 아니다.

다양한 생각을 꺼내고, 검증하며, '최선의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승패는 그 여정을 더 집중하게 만드는 장치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없다면, 승패는 의미 없는 결과표에 불과하다.


이겼어도 배운 게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패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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