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숙한 토론자의 공통점
많은 사람이 토론이 어렵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토론을 잘할 수 있는지 묻는다. 어떤 토론 기술을 배우면 토론을 더 잘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토론을 잘하기 위해서 기술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순서가 잘못됐다. 토론 중에 막히는 느낌이 들고 어렵다고 느낀다면, 그 원인은 기술 부족보다 토론을 대하는 근본적인 관점이 잘못되어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실제로 우리 주변의 논쟁, 회사 회의실, 정치 토론 프로그램을 보면 흥미로운 패턴이 보인다. 정답에 집착하거나, 논리가 전부라고 생각하거나, 다른 의견을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재미있는 사실은, 보통 스스로 토론을 잘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이런 패턴을 더 자주 보인다는 점이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빠지는 사고 패턴에는 무엇이 있고,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미숙한 토론자의 가장 큰 특징은 세상 대부분의 문제에 정해진 답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토론을 빠르게 경직시킨다.
지난 몇 년간 한국에서 뜨거웠던 논쟁들을 떠올려보자. 의대 정원 확대, 최저임금 인상, 저출생·고령화 관련 정책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단 하나라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정답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정치·교육·복지 등의 사회적 쟁점은 언제나 맥락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한 시대에 옳았다고 여겨진 정책이 다른 시대에는 비난을 받거나 폐지되는 일은 흔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경험을 쉽게 보편적인 것으로 일반화한다.
"이 문제의 유일한 해결 방안은 이것이다"라거나 “나는 이렇게 봤으니 이게 맞다”라는 생각은 편하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전체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토론을 할 때 ‘단 하나의 정답’이 있을 것이라는 전제로 접근하면, 다른 관점을 받아들일 여지는 처음부터 사라진다.
정답을 전제하는 순간, 토론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난다. 왜냐하면 “여러 답, 혹은 다른 답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차단되기 때문이다. 토론은 우리의 판단이 주관, 경험, 문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말하자면 '상대주의'라고 하는 여러 답을 인정하는 관점 위에서 성립한다. 이와 반대되는 것이 하나의 절대적 진리가 있다고 믿는 태도다. 상대주의 관점에서 멀어지는 순간, 토론은 더 이상 탐구가 아니라 정답을 확인하는 절차로 전락한다.
두 번째 오류는 이른바 논리만능주의다. 논리만 탄탄하면 상대가 당연히 설득될 것이라 믿고, 설득이 실패하면 “상대가 이해력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여긴다.
이 태도가 위험한 이유는, 논리를 만드는 방식과 논리가 전달되는 방식이 전혀 다르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현실 사례가 바로 ‘65세 정년 연장’ 논쟁이다.
정년 연장을 주장하는 쪽은 “국민연금 수급 시작 연령이 65세로 올라가는데, 60세에 퇴직하면 5년간 소득 공백이 발생한다”는 탄탄한 논리를 제시한다. 고령화 사회에서 숙련 인력을 더 오래 활용해야 한다는 경제 논리도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합리적이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쪽의 반응은 전혀 다른 지점에서 나온다. 이들이 걱정하는 것은 논리의 정합성보다는, “내가 들어갈 일자리가 더 줄어들지 않을까”라는 현실적인 불안이다. (설령 인과관계가 불분명할지라도) 2016년 법정 정년 60세 시행 이후 청년 고용이 줄어들었다는 통계는, 이들이 느끼는 위협을 더 키운다. 이런 경험이 있는 상황에서 “정년 연장은 합리적”이라는 논리만 반복하면, 청년들은 그 말을 “나의 미래가 또 뒤로 밀린다”는 신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때 필요한 것은 더 정교한 경제 데이터가 아니다. 왜 청년들이 그 정책을 자신의 기회 박탈로 느끼는지, 어떤 불안을 품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처럼 세금, 노동, 주거와 같이 이해관계가 얽힌 이슈에서는 논리보다 우려·가치관·감정·신뢰가 설득을 좌우한다. 아무리 정교한 논리라도 상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어떤 가치를 우선하는지, 왜 그 정책을 불안하게 느끼는지 이해하지 못하면 설득은 불가능하다.
논리만능주의는 또 다른 부작용을 낳는다. 배움이 멈춘다. 자신의 논리가 완벽하다고 믿는 순간, 반론은 검증 과정이 아니라 방해물이 된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자기 논리만 반복한다면, 그것은 토론이 아니라 일방적인 발표다. 이렇게 토론을 하면, 그 사람은 토론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성장 기회를 스스로 차단하게 된다. 혼자서 고민한 자기 결론과 가설을 다른 사람과 함께 검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도 말이다.
마지막 함정은 내 의견에 대한 비판을 나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토론의 핵심은 반론이다. 반론이 있어야 논지가 검증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대안을 도출해낼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주장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순간, 모든 반론은 나에 대한 부정으로 들린다.
이 태도는 두 가지 비생산적인 결과를 낳는다. 하나는 감정에 치우친 논의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론을 나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하면 방어적으로 반응하게 되고, 논점은 금세 사라진다. 대화는 상대를 공격하거나 상대를 책임 묻는 말들로 변한다.
다른 하나는 대화의 중단이다. 상대의 말을 끊거나 의도를 왜곡하는 행동이 나타나면서 논의 자체가 진행되기 어려워진다. 더 이야기해 봐야 상처만 남을 것 같으니, 사람들은 아예 토론을 피하게 된다.
토론은 의견을 검증하는 과정이지, 인격을 평가하는 자리가 아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 경계를 혼동하면서 토론을 감정 소모전으로 만든다. 그리고 결국 “토론은 사람만 힘들게 하는 것”이라는 인식만 남는다.
우리가 토론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말을 못해서도, 논리를 모르기 때문도 아니다. 정답 집착, 논리만능주의, 반론 과민 반응이라는 세 가지 태도 때문이다. 그리고 이 태도들은 특별히 성격이 나쁘거나 편협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미디어와 정치·조직 문법 속에서 누구나 쉽게 학습하게 되는 일종의 기본 설정에 가깝다.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내가 토론을 잘하느냐가 아니라, 이러한 사고 패턴을 알아차릴 준비가 되어 있느냐이다. 한 번만이라도 ‘혹시 내가 지금 정답을 쥐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건 아닐까?’, ‘논리만 내세우고 상대의 불안을 못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저 반론을 내 인격에 대한 평가로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고 자문해 보는 순간, 토론은 승패를 가리는 경기가 아니라 서로의 관점을 확장하는 장으로 바뀌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