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8일
한 달 이상 브런치에 글을 못썼다. 그 이유인즉슨 한 달간 제주도 미깡밭에서 살다 오느라 정신이 없어서였다. 겨울이 되면 우리 집은 귤 수확철로 정신이 없는데 이번에는 부모님께서 생애 마지막으로 수확하시는 감귤이기에 멀리 호주에서 날아갔다. 바람이 많은 제주도는 겨울이 되면 기온은 영상이지만 체감온도가 영하로 뚝 떨어진다. 면장갑에 비닐장갑을 끼고 그 위에 작업용 고무코팅이 된 장갑까지 총 세 겹을 낀 채 또각또각 정전가위로 귤을 땄다. 어찌 됐든 60프로 정도 수확을 하고 선별을 마쳤다. 나머지는 2월 한 달 동안 부모님께서 일꾼들 빌려서 마무리하시겠다 하셨다. 그리고 오늘 고향살이를 마치고 호주에 도착한 지 일주일 째다. 무더운 여름방학이 끝나고 1학기가 이미 시작된 호주였고 도착 다음날부터 새벽 청소일을 나갔다. 쉴 새 없이 한주가 지나갔다. 한 달간 비워두웠던 울릉공 집도 먼지 청소로 깨끗해졌다. 피곤한 몸도 주말에 푹 잘 수 있어서 조금 괜찮아졌다.
학교는 역시나 시끌벅적, 초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하이스쿨에 입학한 새 학년인 7학년 아이들의 교실 찾기 대소동은 정말 귀여웠다. 고등학교 11, 12학년 선배들은 엄청 크고 대선배로 보여 물어보지도 못하고 삼삼오오 자기들끼리 이 교실 맞나 어디지하며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웃음이 났다. 물론 스스로 찾아야 하기에 어디라고 딱 알려주지 않았다. 새 학년이면 겪어야 하는 신고식이기에…
아니다 다를까. 청소대장 제니스 아줌마는 웰컴백이라고 소리치며 힘껏 나를 안아주면서 반겨주었다. 학교 수위사 개리 아저씨도 정다운 어깨동무로 뭐하다 이제 왔냐면서 호주사람 특유의 반가운 혼구녕으로 맞아주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한국을 다녀올 때면 호주 친구들에게 기념품으로 오이비누를 나누어 주는데 많은 개수를 사도 저렴한 가격에 효율성이 최고다. 하나같이 오이로 비누를 만들어 쓴다고? 라며 놀라면서 킁킁거리며 엄청 좋아한다. 솔직히 한국에선 싸구려 비누취급하며 잘 쓰지도 않는 오이비누인데 아무튼 엄청 인기상품이다. 제니스아줌마와 개리 아저씨에게 두 개씩 나누어 주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하나씩 기념으로 나누어 주었다. 메이드인코리아라고 하니 다들 엄청난 뷰티제품인 줄 아는 것 같았다. K뷰티의 힘! 나름 뿌듯했다.
참고로 우리 학교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은 나와 청소대장 제니스 아줌마를 포함해 총 6명이다. 나랑 가장 친한 방글라데시에서 온 나지르는 원래 올림픽 경기장 같은 스타디움 (럭비, 콘서트 등) 경호원일을 하는데 코로나가 터지면서 청소일을 하게 된 친구다. 나지르는 내 친남동생과 동갑에다 내 조카와 비슷한 또래의 아기를 키우는 초보아빠이기도 해 정이 간다. 조르카 아줌마는 환갑이 넘은 마케도니아 이민자인데 이십 년도 넘게 제니스 아줌마와 같이 우리 학교 붙박이마냥 청소를 해왔지만 짧은 영어로 뭘 잘 몰라 헤매는데 제일 부자다. 그리고 아프리카 토고에서 정치난민으로 이민 온 아그네스와 버니스 아줌마, 둘 다 거의 문맹에 가깝고 프랑스령이던 토고에서 불어를 쓴 통에 의사소통이 너무 힘들다. 심지어 영국태생 호주인 제니스 아줌마는 참지 못하고 나에게 통역을 요구한다. 나는 난민촌 생활을 하던 실력으로 (토고는 불어를 쓰지만) 천천히 듣고 감정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무슨 할 얘기가 있으면 아그네스와 버니스는 나한테 눈을 돌린다. 진심으로 들어주면 불어억양에 문법은 뒤죽박죽이지만 정황상 단어 단어 조합이 되고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 의중을 파악하게 된다. 어찌 됐든 버니스는 오늘 나에게 오이비누 최고라고 엄지척을 해 보였다. 그래서 또 하나 갔다 주겠다고 손가락으로 숫자 하나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영어에는 바디랭귀지가 필요하다. 오 마이 갓!...
그리고 무엇보다 번역 및 감수일을 봤던 책의 가제본이 멀리 한국에서 미국출판사 사장님의 손글씨와 함께 날아왔다. 다음번에 한국 오면 꼭 보자고, 번역 고맙다고… 곧바로 카톡메시지를 드렸다. 호주까지 가제본 두권이나 보내주어서 고맙다고, 연이어 답장이 오셨다. 지금 현재 작업 중인 남아공 작가의 책은 판권문제 관련 확답이 없으니 또 한 번 연락해 보겠지만 일단 보류하자고, 그리고 판권을 보유하고 있는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미국작가의 책을 번역해야 할 것 같다면서 언질을 주셨다. 하드 드라이브에는 번역하다 그만둔 작품들이 하나하나 쌓여갔지만 번역 실력 또한 한 층 한 층 쌓여갔다. 궁금하다 새책…어떤 내용인지… 읽고 싶다 빨리. 내일모레 원본파일 보내달라고 요청을 드려야겠다.
또 이렇게 일주일도 채 안되어 호주의 삶에 곧바로 적응이 된다. 드넓고 푸른 호주의 바다가 내 고향 제주도의 푸르른 바다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안다. 여전히 고향과 타향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둘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한국과 호주를 왔다 갔다 하며 부딪히는 문제들이 있다. 잘 조정하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아무튼 조금 더 고민해보고 좋은 글로 적어볼까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