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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추꽃 Jul 02. 2019

당신은 어떤 놀이를 하는 어른인가요?

진로탐색이 아닌 '놀이탐색'으로 되찾은 '나'

' 흐르 사는 게 좋은 거다', '좋은 게 좋은 거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게 좋은 거다'라는 말에 익숙했다. 그래서 결국 선택의 순간에는 남들이 많이 하는 선택,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선택, 튀지 않는, 대세와 크게 어긋나지 않 선택을 하게 되었던 듯하다. 안전한 길, 조금 더 확실한 길. 이것도 선택이라면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돌이켜보면 작은 나룻배를 타고 주류 속에서 미친 듯이 노를 저으며 작은 샛길들이 나타날 때마다 '저쪽은 어떨까?'하고 짧게 방향을 바꾸어 보는 것을 고려하다가, 저쪽은 더 험하다는 얘기를 듣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큰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고 미친 듯이 노를 젓는 그런 삶이었다. 모두가 이게 좋은 거라고 하니까 이게 좋은가보다 하면서.


끝까지 이렇게만 살다가 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 본인이 행복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문제가 생겼다.


'행복하지 않다.'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대학을 가서, 성실하게 대학생활을 마치고, 어려운 취업준비를 끝내고 좋다는 기업에 왔다(이렇게 써놓으니 순탄하게 온 것 같지만 저 중 어느 하나 쉬운 건 없다). 행복할 것이다 생각하고 이 길로 왔는데 이 길은 막다른 길이다. 막다른 길인 것은 맞지만 가진 것에 만족하고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였다. 그것조차 없는 사람들도 많다고 복에 겨웠다는 핀잔을 들었다.


처음엔 그래서 환경이 더 열악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행복해지려고 노력했다. 옷 한 벌 살 돈이 없어서 천 원이라도 더 주는 중고 책방을 찾아 다 읽은 교재를 몰래 팔아 옷을 사 입던 그 시절, 여행 갈 돈 같은 건 없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그래도 지금은 내가 번 돈으로 책도 여러 권 사고 옷도 여러 벌 사 입을 수 있지 않은가. 그걸 생각하면 지금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며 나 스스로에게 행복을 강요했다, 마치 불행의 권리가 없는 사람처럼. 그러다 보니 점점 더 지쳐갔던 것 같다. 이미  길의 끝은 이 회사라고 정해졌는데, 여기서 뭘 더 기대할 수는 없는데, 그 상태에서 행복해져야 하니까.


그렇게 무기력했던 나에게 남편이 제목을 보고 필요한 책인 것 같다며 사준 책이 바로 <사는 게 힘드냐고 - 니체가 물었다>이다.



1. 너, 같은 삶이 수없이 반복되더라도 그렇게 살 거야?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이란 말 그대로 ‘모든 것은 영원히 되돌아온다’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크고 작은 슬픈 일 또는 기쁜 일은 혹시라도 다음 세상이 있다면 영원히 되돌아온다는 사상입니다. 니체는 이것을 곧 하나의 사상적 실험이라고 일컫기도 했는데, 이런 영원회귀 사상은 ‘모든 것이 영원히 되돌아오더라도 그대는 생을 사랑할 것인가’라는 물음 앞에 우리를 세웁니다.” <사는 게 힘드냐고 – 니체가 물었다> 에서


박찬국 교수 책에 소개되어 있는 이 사상은 나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한 번도 내가 했던 선택들을, 내가 살고 있는 인생을 그러한 관점에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흔히 다음 세상이나 다음 생에 대해 어느 정도 보상심리를 투영해 생각하는 것에만 익숙하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이 더 낯이 익어 이 상황이 똑같이 반복될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기 힘들다. 지금 겪는 이 고통을 묵묵히 참아내면 축복이 내려지리라, 당장 지금 생이 아니더라도 다음 생에 보상받으리라. 이런 마음으로 요즘 말로 소위 ‘존버’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나만해도 불교는 아니지만 3년간 나에게 온갖 시련을 주는 직장 상사를 겪으며 '내가 이 사람에게 전생에 많은 죄를 지었나 보다, 묵묵히 죗값을 치러야 하는 건가, 버텨내면 내세에는 이런 악연으로 만나진 않겠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많다.


“이러한 사상이 너를 지배하게 된다면 그것은 현재의 너를 변화시킬 것이고 아마 분쇄해버릴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 하나하나에 가해지는 ‘너는 이것이 다시 한번 또는 수없이 계속 반복되기를 원하느냐?’라는 질문은 가장 무거운 무게로 너의 행위 위에 놓이게 될 것이다.” – 니체


이 글을 읽으며 나는 지금부터라도 내 삶을 '버티는 방식'으로만 흘려보내지 말자고 다짐하게 되었고, 조금 더 삶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욕심이 생겼다. 단순한 욕심이라기보다는 ‘결단’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 되겠다. 니체는 사상적 실험이라고 일컬었지만, 정말로 모든 것이 똑같이 반복될는지 누가 알겠는가? 종교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순간순간 그저 참고 버티며 변화를 불러낼 용기를 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것에 익숙해 다음에도 비슷한 경로를 걷게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2. 아이처럼 사는 것


니체는 우리에게 아이처럼 살아보라고 한다.


"아이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말은 곧 인생을 유희처럼 사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어떤 재미있는 놀이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왜 이 놀이를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놀이가 재미있어서 놀 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순간에 '왜 이 놀이를 해야 하지?'라며 놀이의 의미를 묻게 될까요? 그것은 바로 놀이의 재미가 사라졌는데도 속해서 그 놀이를 해야 할 때입니다. [...] 우리가 삶의 의미를 묻게 되는 것은 삶이 더 이상 재미있는 놀이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으로 느껴질 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삶을 무거운 짐으로 느끼면서 '왜 이 짐을 짊어져야 하지?'라고 묻게 되는 것입니다." <사는 게 힘드냐고 - 니체가 물었다> 중에서


이 대목이 나에게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그저 환경이 힘들었던 시기를 떠올리며 생계유지에 감사하는 것은 나에게 필요한 원동력가져다주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점과, 내가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억지로 자기 세뇌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 아이처럼은 커녕 이 회사만 왔다 갔다 하는 나는 바보가 된 20년 후의 내 미래가 히 보여서 숨이 막히는, 거의 인생을 다 산 노인의 심정이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3. 진로탐색이 아닌 놀이탐색을 하며 만나게 되는 '나'란 사람


나는 '놀이'라는 단어에 집중했다. 저기서 말하는 '놀이'는 그저 단순히 일하면서도 열심히 영화를 보고, 여행을 다니고, 오락실을 가라는 의미 같진 않았다. 이 '놀이'에 관한 실마리는 정재승 교수의 <열두 발자국>에서 찾았다.


"어떤 일을 하며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많이 받지만, "넌 뭐하면서 놀래?", "혼자 있는 시간에는 뭘 할 거야?",  "여유로운 시간이 생기면 어떻게 놀아야 제대로 노는 걸까?" 같은 질문은 하지 않습니다. "너는 어떻게 노는 어른이 될래?"는 별로 받아본 적이 없는 질문일 거예요. 하지만 인간은 일하는 시간만큼이나 많은 시간을 노는 데 사용합니다. 어떻게 노느냐가 그 사람을 규정합니다. 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시간도 바로 노는 시간이지요." <열두 발자국> 중에서


어떻게 노느냐가 그 사람을 규정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즐길 수 있는 놀이. 그리고 그 기운이 확장되어 이루어지는 놀이 같은 삶. 어떻게 노느냐가 그 사람을 규정할 정도면 이것은 단순한 '취미생활' 그 이상인 것이다.


내가 어떻게 '노는' 사람인지에 대해 탐구해 보려면 내가 본질적으로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해보아야 한다. '놀이탐색'은 돈벌이 수단과 결부시키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어떻게 돈을 벌어먹고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직결되는 '진로탐색'보다는 훨씬  자유로울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활동, 내가 기꺼이, 아낌없이 시간을 쏟고자 하는 것. 누가 뭐가 좋다더라, 그거 하면 밥 굶으니까 안된다더라 등의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마음껏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보는 것. 남들에게 평가를 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내 스스로에게도 더 관대해질 수 있는 것. 실패와 성공 가능성을 계산해보지 않아도 되는 것.


그렇게 시작한 것 중 하나가 브런치.




그리고 신기한 것은 이렇게라도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나니 로소 '나'라는 사람을 알아가 친해지는 과정이 조금 더 수월해졌고, 이런 태도는 내 삶의 다양한 분야로 스며들었다.


직장을 다니는 것도 결국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들이 직장이 그 정도면 괜찮다고 해서 다니는 것과 내가 주체적으로 다녀야겠다고 선택해서 다니는 것은 결론은 같지만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내리는 결론이 설사 '란 사람은 지금 당장 직장을 관둘 형편이 되지 않고, 당분간은 고정적으로 나오는 소득을 포기할 수가 없다. 그리고 직장생활을 하며 정말 부조리한 일이 많이 생기지만 당장 때려치우고 나올 정도로 현재 내가 못 견딜 정도는 아니다'라는 결론이라 할지라도. 그럼 적어도 '내가 이러이러한 목표를 이룰 때까지 이러이러한 것을 얻기 위해 다녀야겠다. 하지만 나에게 이러이러한 것을 요구한다면 참고 다닐만한 상황은 아니다' 등의 목표와 기준을 세우게 된다. 이렇게 스스로 고민해보고 내리는 결론이 주변 사람들의 '거기 정도면 괜찮은데, 감사하며 다녀야지'라는 말보다 천만번 더 값진 동기부여가 된다. 동기부여의 주인공은 결국 '나'여야만 한다.


"내게 선택권이 있음을,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음을, 그리고 공부든 일이든 인생이든 뭐든지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을 때 그 사람은 그 어떤 사람보다 동기화될 것이며 자신이 원하는 목표에 기어이 도달하게 될 것이다." <두근두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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