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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글빛 Feb 10. 2020

책과 나

내가 책을 읽는 이유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흘러간 삶의 궤적 속에 쉽게 망각하고 있었던 나를 어느 책 속에서 우연히 만났다. 나는 유년의 어느 추억 한편에 잊어버렸던 시절과 만나게 되었다. 단지 책의 한 문장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책의 문구는 간결하고 아름다웠다. 그 문장 속에서 나를 보니 슬픔을 간직하고 어깨를 다소 움츠리고 있는 한 소년이 앉아있었다. 분진처럼 멀리 날리고 없어진 나의 삶의 일부들이 다시 뭉쳐졌다.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느낌은 선명하고 따뜻하고 뭉클했다. 깊은 내면에서 나의 모습이 머리 위에서 영상처럼 펼쳐졌을 때 나는 나의 모습을 보고 보듬어 주고 있었다. 그 깊은 여운은 가슴속에 아직도 오래 머물고 있다. 


내가 책을 읽을 때 나의 모습들이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문장 속에 숨겨진 나의 소중한 기억들이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했다. 문장을 읽어갈 때 기억들은 돋아난다. 잠자고 있는 나의 기억들을 하나씩 깨우며 소중한 기억들은 명확하게 그려진다. 시간에 따라 흘러간 기억들, 빛바랜 기억들이 어디서 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책의 어느 문장을 통해서 선명해진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쉽게 생각해보면 글을 쓰다가 톡 떨어트렸던 만년필 잉크 한 방울이 종이에 우연히 떨어졌다. 이윽고 잉크가 퍼져나갈 때 생각과 기억들도 함께 퍼져나가게 된다. 인쇄된 책도 작가의 사상과 신념이 종이 위에 묻은 잉크들이 활자에 고스란히 새겨진다. 책이 펼쳐지면 활자들은 빛을 만나면서 기지개를 슬슬 켜고 일어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따스한 햇볕이 책에 전달될 때 나는 숲을 생각해본다. 내가 숲을 걸어갈 때 숲 속에 펼쳐진 오솔길 사이로 햇살이 가득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 산들바람이 일고 있었고 나뭇가지에 싱그럽게 붙어있었던 초록 잎사귀는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때 나무들이 대화하는 소리를 들었다. 자기들끼리 잎을 움직이며 토론하는 나무들, 햇살이 좋다고 더욱더 하늘을 향해 움직이는 나무들, 땅속 개미 떼가 자기 뿌리를 간지럽힌다고 볼멘소리 하는 나무들, 몸에 붙은 이끼가 색이 바랬다며 걱정하는 나무들, 숲 속에서 나무들이 대화를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어느새 나는 나의 소중한 추억들과 기억들이 다시 소환되곤 했었다. 그래서 숲을 자주 가게 되면 손에 책은 없지만, 책을 읽는 기분이 든다.


책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나를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였다. 나는 내 기억 저편으로 가끔 시간 여행을 한다. 그 시간 속 어느 길목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만난다. 책에 나열된 활자 하나하나가 조합되어 문장이 만들어져 가슴속에 전달된다. 문장을 읽어 나아갈 때 나는 시간 속에서 조금씩 움직이고 여행 속 열차는 속도를 내서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한다. 기차에서 보이는 창밖 풍경은 내 내면에서 깊게 잠자고 있었던 숨기고 싶은 기억이거나 아니면 무심코 지나갔었던 스쳐 지나간 기억들인 것 같다. 때로는 잃어버렸던 퍼즐의 한 조각을 찾는 기분이 들기도 했었다. 나에게 책은 삶의 한 파편의 조각들을 찾아주는 도구가 아닌가 싶다.


거울을 닦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는 것 같다. 현실의 거울은 손으로 닦으면 쉽게 사물이 보이겠지만 나의 내면의 거울은 어떻게 닦아야만 하는 것일까 하고 여러 번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책을 만나 우연한 문장을 읽고 나의 비뚤어진 거울을 바로잡고 얼룩진 거울을 닦은 경험이 있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알았던 사실은 책을 통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게 아니고 나의 내면에 자리 잡은 거울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내면의 눈이었다. 그때야 알았다. 책을 통해서 나는 조금씩 내면의 거울을 닦아서 나의 눈을 보려고 힘을 기르고 있다. 


나에게 책은 여행이다. 서두를 필요는 없어 보인다. 책을 펼치는 순간 긴 여정은 이미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책에서 따로 찾고자 했었던 특별한 것들도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주어진 시간 속에서 나를 찾고자 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여행한다. 그것은 미지의 우주처럼 끝없고 기나긴 항해이다. 나는 거기서 잠시나마 나를 본 것이다. 불안전하고 미약한 나란 존재를. 나는 언제 어디서나 전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를 만나 허우적거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현실에서 나와 만났던 사람들은 여행하는 사람들도 있고 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 옛날 사람들이 하늘을 보고 생각했던 상상과 이야기를 생각해본다. 그 상상이 오늘은 현실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책은 나에게 하나의 도약 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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