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을 떠올리는 사람은, 먼저 살아남으려 한다
불안은 갑자기 오지 않는다.
불안은 습관처럼 온다.
어떤 생각 하나가 입구를 열면, 그 다음은 늘 익숙한 길이다.
“혹시 망하면?”
“혹시 미움받으면?”
“혹시 내가 틀렸으면?”
이 질문들은 조심성처럼 보인다.
현명함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삶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삶을 잃을까 두려워서 나온다.
불안은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에서 태어난다.
인간은 앞을 본다.
앞을 보는 존재는 늘 두 가지를 본다.
가능성과 위협.
불안은 그중 위협을 더 선명하게 칠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불안한 사람은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
위험을 먼저 감지하려는 사람이다.
문제는 그 감지가 멈추지 않는다는 데 있다.
불안이 강할수록 우리는 최악을 떠올린다.
최악을 떠올리면 대비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악을 오래 떠올리면
대비가 아니라 생활이 된다.
미래의 비극을 미리 살고,
아직 오지 않은 패배를 이미 겪는다.
몸은 현재에 있는데,
마음은 계속 장례식을 치른다.
불안은 보호의 탈을 쓰고 다가온다.
“너를 위해서야.”
“혹시 모르잖아.”
“준비해야 해.”
그 말은 그럴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을 내쫓지 못한다.
불안이 없으면 무모해질 것 같고,
불안이 없으면 망할 것 같고,
불안이 없으면 사랑받지 못할 것 같으니까.
여기서 습관이 굳어진다.
불안이 올라오면,
우리는 불안을 ‘신호’가 아니라 ‘진실’로 승인한다.
불안은 잠깐 스쳐가는 날씨였는데,
우리는 그것을 예언으로 만든다.
예언이 되면 삶은 좁아진다.
피할 길만 찾게 되고,
지킬 것만 세게 쥐게 된다.
쥐는 힘이 강해질수록 손은 피곤해진다.
불안은 때로 아주 작은 사실에서 시작한다.
답장이 늦다.
표정이 무심하다.
말끝이 차갑다.
그 사실 위에 생각이 층층이 올라간다.
그는 나를 싫어한다.
나는 버려질 것이다.
나는 결국 혼자일 것이다.
한 칸씩 내려가다 보면,
마침내 지하에서 ‘나’라는 결론을 만난다.
그 결론이 불안의 집이다.
불안을 없애려 하면 불안은 더 커진다.
불안은 싸움을 먹고 산다.
가라앉히려는 손길을 ‘위험’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불안을 이기겠다는 마음은
불안에게 더 큰 무기를 준다.
불안을 다루는 시작은 의외로 단순하다.
최악을 떠올리는 그 순간,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 습관임을 알아차리는 것.
불안은 미래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내가 가진 상처의 방식일 때가 많다.
상처는 늘 같은 질문으로 돌아온다.
“나는 안전한가.”
“나는 사랑받을 수 있는가.”
오늘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두려움은 정말 지금의 사실인가,
아니면 오래된 습관의 목소리인가.
그리고 그 목소리를,
진실의 이름으로 먹이고 있지는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