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상대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내 마음의 시간을 되찾는 일이다
원망이 오래가면
시간이 이상해진다.
그 사건은 이미 끝났는데
내 마음은 아직 그날에 살고 있다.
상대는 오늘을 살고
나는 과거를 산다.
원망은
상대를 벌주는 것 같지만
결국 내 하루를 가장 오래 가져간다.
그래서 원망이 깊어질수록
삶은 좁아진다.
좋은 일이 있어도
온전히 기쁘지 않고
평범한 하루에도
그 사람의 그림자가 따라온다.
원망은
마음속에 ‘재판장’을 만든다.
그 재판장은
매일 같은 증거를 꺼내고
매일 같은 판결을 내린다.
“그 사람은 틀렸어.”
“그 사람은 나빴어.”
“나는 피해자야.”
판결이 틀린 건 아니다.
아팠다면, 아팠다.
억울했다면, 억울했다.
하지만 판결이 반복되면
마음은 치유가 아니라
소모를 선택한다.
법구경이 보여주는 길은
억지로 웃는 용서가 아니다.
상처를 없던 일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원망을 내려놓는 일은
정의를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내 마음의 시간을 되찾는 일이다.
내려놓음은
상대에게 선물을 주는 게 아니다.
내가 내 삶을 다시 받는 일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동안
내가 품고 있는 원망 하나를
조용히 떠올려본다.
그리고 그 원망 아래에 있는 감정을 본다.
대개 원망 아래에는
서운함이 있고
두려움이 있고
슬픔이 있다.
원망은 종종
그 감정들을 덜 느끼기 위해
만들어진 갑옷이다.
갑옷을 입고 있으면
단단해 보이지만
숨은 얕아진다.
그래서 오늘은
갑옷을 벗으라는 말이 아니라
갑옷이 있다는 사실을
한 번만 인정한다.
지금, 원망이 있다.
지금, 상처가 있다.
이 문장은
상대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나를 무시하지도 않는다.
다만
원망과 나 사이에
얇은 거리를 만든다.
거리가 생기면
나는 선택할 수 있다.
원망을 더 키울지.
아니면
내 삶을 더 살릴지.
원망을 내려놓는 첫걸음은
마음속에서
‘반복’이 시작되는 순간을 아는 것이다.
그 사람이 떠오를 때
그 사건이 재생될 때
내 마음이 다시 뜨거워질 때
그 순간에
결론을 내리기 전에
숨이 한 번 들어오고
숨이 한 번 나간다.
그 왕복만으로도
마음은 조금 덜 달아오른다.
원망이 줄어들면
상대가 좋아지는 게 아니다.
내가 살아난다.
내가 오늘을 살게 되고
내가 내 일을 하게 되고
내가 내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래서 원망을 내려놓는 일은
고상한 미덕이 아니라
가장 현실적인 자기 보호다.
나는 더 이상
내 하루를
그 사건에게 내주지 않겠다.
지금, 내가 있다.
지금, 숨이 있다.
그 사실이 먼저 서면
원망은
내 마음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원망은 끝나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오늘
단 한 번만
조금 덜 붙잡는다.
그게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