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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 세상이란 무엇인가?

허상 속의 진실

by 데브라

세상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언제나 우리를 조금 더 깊은 수면 아래로 이끌어 간다.


바람 한 올에 흔들리는 연기처럼,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장면은 단단한 외피를 가진 듯 보이지만,

사실은 얇고 민감한 진동의 막 위에서 피어난다.


감각은 이 막을 두드리는 빛과 파동을 모으고, 마음은 그 조각들을 엮어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

그리하여 태어난 ‘현실’이라는 이름에는 언제나 미세한 떨림, 설명되지 않은 잔향이 스며 있다.


영화 매트릭스는 이 떨림을 적나라하게 펼쳐 보인다.

네오가 살던 세계는 정교한 데이터의 흐름이었고, 그가 보고 듣고 느끼는 장면들은 완벽히 설계된 모사였다. 그러나 시뮬레이션을 벗어난 뒤에도, 그가 서 있는 세계가 절대적 진실이라 확신할 수 없었다.


한 껍질을 벗기면 또 다른 껍질이 나타나는 구조는 “만물은 허망한 그림자와 같다”는 동양의 오래된 직관과 자연스럽게 겹친다.

양파를 벗기다가 끝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은유는 불교의 ‘공(空)’ 사상과 잘 어울리는 현대적 비유다. 실재를 향해 다가갈수록 손에 남는 것은 더 미묘하고 얇은 결의 파동이다.


불교에서는 이 세계를 ‘색(色)’이라 부른다.

색은 물질의 외형이 아니라, 빛의 반사와 파동의 흐름, 그리고 인식이 만든 형상의 총체다.

《반야심경》은 말한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은 본래 공이며, 공은 곧 색이다. 이는 세계가 허무하다는 말이 아니라,

텅 비어 있기에 무한한 가능성으로 충만하다는 뜻이다.


공은 ‘없음’이 아니라 형상이 일어나는 근원적 자리.

그 자리에 의식이 빛을 받아들일 때, 우주의 연극은 드디어 막을 올린다.


도가에서는 장자(莊子)가 이 진실을 호접지몽(蝴蝶之夢)으로 전했다.


“昔者莊周夢爲胡蝶… 不知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 — 《莊子‧齊物論"


장주는 꿈속에서 호접이 되어 날아다녔다.

그 순간 그는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깨어보니 분명 장주였으나 장주가 호접의 꿈을 꾼 것인지 호접이 장주의 꿈을 꾼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장자는 이 경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호함 속에서 존재의 투명함을 보았다.

‘나’와 ‘현실’이라는 감각이 모두 잠시 빚어진 파동임을 직관했다.


동양 문헌은 이 세계를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 불러왔다.

봄날처럼 피었다 사라지는 꿈, 찰나의 장면들. 《법구경》은 “거품 같고, 안개 같고, 꿈과 같다”고 말했다.


무상은 허무가 아니라 순간순간 세계가 새로 태어난다는 지혜다.

세계는 하나의 고정된 무대가 아니라, 찰나가 연속되어 이어지는 살아 있는 경전이다.


현대 물리학의 홀로그램 우주론 역시 이 고전적 직관을 과학의 언어로 되풀이한다.

3차원의 세계는 더 얇은 차원에 저장된 정보의 투영일 수 있다.


이는 과학적 가설이지만, 동양의 오래된 직관과 비유적으로 닮아 있다.

우리가 물질이라 믿는 것들은 파동과 정보의 얽힘 속에서 잠시 나타나는 장면일 수 있다.

양자역학의 ‘파동함수 붕괴’ 또한 의식과 관측이 장면을 드러낸다는 철학적 해석과 연결해 볼 수 있다.


선도에서는 이 세계를 ‘허(虛)’ 위에 피어난 ‘화경(化境)’이라 한다.

허는 비어 있으면서 만물을 낳는 자리이고, 화경은 그 자리에서 피어나는 순간의 풍경이다.

그래서 세계는 진짜도 가짜도 아니다.

잠시 빛이 응집하여 만들어낸 장면이며, 그 장면 자체가 생명의 숨결이다.


세계가 허상이라고 해서 하찮은 것이 아니다.

허상이기 때문에 더 섬세하고, 더 깊고, 더 찬란하다.

꿈이기 때문에 헛된 것이 아니라, 꿈이기 때문에 더욱 진실하다.


텅 빈 공 위에 맺힌 빛 한 점이 우리에게 사랑을 안기고, 고통을 가르치고, 깨달음을 일으킨다.

장면은 사라지지만 그 장면을 지나온 마음은 깊어진다.

그 깊어짐이 바로 삶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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