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주지 않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
누군가가
의미를 건네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이 시간이 왜 필요한지,
이 고생이 왜 있었는지,
이 마음이 왜 이렇게까지 무너졌는지.
누가 와서
“이건 다 이유가 있어요”
라고 말해주면
조금은 덜 외로울 것 같아서.
하지만 삶은
대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설명은 오지 않고,
정답은 내려오지 않고,
우리는
그저 하루를 다시 시작한다.
그래서 의미를 기다리는 사람은
종종 지친다.
기다렸는데도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을 때,
마음은 이렇게 속삭인다.
“그럼 이건 뭐지?”
“내가 버틴 건 대체 뭐였지?”
의미가 없는 삶이 아니라,
의미가 오지 않는 삶이
사람을 더 오래 흔든다.
우리는 그때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한다.
첫 번째는
세상이 나를 버렸다고 믿는 것.
두 번째는
아무도 주지 않는다면
내가 만들어야 한다는 걸 인정하는 것.
여기서부터
삶의 결이 달라진다.
하지만
“만든다”는 말은
생각보다 잔인하다.
의미를 만들라는 말은
결국
이 모든 무게를
내가 떠안으라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세상이 차갑고
삶이 무심한데
왜 나만 애써야 하느냐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의미를 만들기 전에
먼저 지쳐버린다.
여기서
흐름은 한 번 더 꺾인다.
어쩌면
의미를 만든다는 건
거창한 창조가 아닐지도 모른다.
삶을 설명하는 문장을 만드는 게 아니라
삶을 견디는 방식을 만드는 것.
대단한 목표를 세우는 게 아니라
오늘을 망치지 않는 작은 선택을
하나 더 하는 것.
의미는
찬란한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는 태도 속에서 생긴다.
누군가에게 의미는
“나는 여전히 정직하게 살고 있다”는 감각이고,
누군가에게 의미는
“내가 무너졌다는 걸 인정했다”는 용기이고,
누군가에게 의미는
“오늘은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는 결심이다.
이것들은
누가 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의미를 크게 만들려는 사람보다
의미를 작게 만드는 사람이
더 오래 간다.
작게 만든 의미는
비웃음에도 무너지지 않고,
불운에도 쉽게 깨지지 않는다.
“그게 무슨 의미야?”라는 말 앞에서도
조용히 살아남는다.
우리는
삶이 우리에게 의미를 주지 않는다고 해서
삶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삶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으니까.
대신 우리는
의미가 없음을 핑계로
스스로를 버리지 않는 쪽을 택할 수 있다.
이 선택은
희망이라기보다
존엄에 가깝다.
그리고
여기서 마지막으로
흐름이 엎어진다.
의미는
삶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라,
우리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생겨난다.
그러니까
의미가 없다고 느껴지는 날은
실패한 날이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아직도 내가
의미를 원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 욕망은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늘도 의미가 오지 않는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만 만들어도 된다.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을 버틴 내가
내일의 나를
조금 덜 미워하게 만드는 정도면 충분하다.
그 정도의 의미면
이상하게도
사람은 다시 걸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