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고,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다.
추함이 있으면 아름다움이 있고,
깨끗함이 있으면 더러움이 있다.
세상은 늘 이렇게 짝을 이루며 지나간다.
어느 하나만 고정해서 가질 수 없고,
어느 하나만 골라서 붙잡을 수도 없다.
빛이 영원하지 않듯, 어둠도 영원하지 않다.
다만 우리는 자꾸 한쪽에 집을 짓는다.
좋은 것 위에만 살고 싶어 하고,
싫은 것은 없는 일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 마음이 괴로움의 문을 연다.
만남을 붙잡으면 이별이 원망이 되고,
아름다움을 붙잡으면 추함이 두려움이 되고,
깨끗함을 붙잡으면 더러움이 죄가 된다.
세상은 그대로 흐르는데,
마음은 흐름을 죄로 바꾼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늘 뒤를 돌아본다.
이미 떠난 것을 다시 붙잡으려 하고,
이미 끝난 말을 되돌리려 하고,
이미 지나간 자신을 다시 살리려 한다.
그렇게 돌아보는 동안
현재는 얇아지고, 마음은 무거워진다.
불교는 냉정하게 말하지 않는다.
다만 정확하게 비춘다.
붙잡는 마음이 스스로를 묶고 있다고.
그러니 무엇 하나 붙잡지 말라.
이 말은 차갑게 외면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더 가까이 보라는 뜻이다.
오는 것을 오게 두고,
가는 것을 가게 두는 것.
그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것.
“뒤를 돌아보지 마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과거를 지우라는 말이 아니라,
과거에 내 목을 묶지 말라는 말이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이 길어지면,
현재는 늘 부족해진다.
현재가 부족해지면, 마음은 다시 무엇인가를 붙잡는다.
그 반복이 업의 길이 된다.
그래서 어떤 문장은 칼처럼 남는다.
무소의 뿔처럼 나아가라.
홀로 가라는 뜻이 아니라,
붙잡힘 없이 가라는 뜻이다.
남의 시선에 매달리지 않고,
남의 기대에 갇히지 않고,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에도 끌려가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것은 바깥에 없다.
그러니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내가 붙잡을 마지막 자리는
오히려 “붙잡지 않음”일 수 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 말을 오해하면 교만이 된다.
하지만 깊이 보면, 이것은 교만이 아니라 존엄이다.
남과 비교해서 위에 서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비교 자체를 내려놓는 선언에 가깝다.
나는 나로 서고,
너는 너로 선다.
누구의 삶도 누구의 대체물이 아니다.
그러니 남의 기준으로 나를 재판하지 않고,
내 기준으로도 나를 벌하지 않는다.
오는 것은 오게 두고, 가는 것은 가게 둔다.
만남을 귀히 여기되, 이별을 죄로 만들지 않는다.
추함이 올라와도 숨기지 않고,
아름다움이 와도 붙잡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마음은 이상하게 가벼워진다.
가벼워진 마음은,
자연히 앞으로 나아간다.
소리 없이, 그러나 분명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