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이 녹는 속도

by 데브라

눈이 오기 직전의 공기는 늘 미리 사과를 한다.

“곧 차가워질 거야.”
그 말이 들리면 나는 괜히 코끝을 문지르고, 목도리를 한 번 더 조여 맨다. 오늘도 그랬다.


집 앞 편의점은 겨울이 되면 유독 밝다. 형광등이 눈 속에서 더 하얗게 빛나서 그런지, 그곳은 추위를 잠시 잊게 만드는 작은 방처럼 보인다. 나는 뜨거운 캔 커피를 들고 나와 손바닥에 붙였다. 금속이 체온을 빨아들이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속삭이는 듯했다.


문을 나서자 바람이 골목을 비집고 들어왔다. 마치 누군가의 비밀을 들춰내려는 것처럼, 옷깃 사이로 성급하게 파고든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걸었다. 세상은 겨울이면 쉽게 무너진다. 낙엽도, 사람의 마음도, 그리고 말 한마디도.


“춥죠.”


뒤에서 들린 목소리는 지나치게 낮지도 높지도 않았다. 어떤 온도로도 규정되지 않는, 애매한 따뜻함. 나는 돌아보지 않고 “네”라고 했다. 겨울에는 대답이 짧아진다. 공기가 말을 길게 허락하지 않아서.


그는 내 옆으로 걸어와 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을 보여줬다. 편의점 커피였다.
“이거, 설탕을 넣었는데… 오늘따라 너무 달아서요.”


나는 웃을 뻔했다. 달아서 괴로운 말은 오랜만에 들어서.
“겨울에는 단 게 더 잘 느껴져요.”
“왜요?”
“차가운 건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잖아요. 상처도 더 잘 느껴지고.”


그는 잠깐 멈칫했다가, 종이컵의 뚜껑을 손톱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러면… 달콤한 것도 더 잘 느껴지는 거네요.”
“그렇죠. 그런데 달콤한 건 빨리 사라져요.”
“녹아서요?”
“네. 손이 따뜻하면, 설탕은 금방 녹거든요.”


말이 끝나자마자 바람이 한 번 세게 불었다. 둘 사이의 공백이 갑자기 깊어졌다. 겨울의 대화는 늘 그런 식이다. 한 문장이 뜨거워지려고 하면, 계절이 얼른 그 온도를 뺏어간다.


우리는 신호등 앞에서 같이 멈췄다. 빨간 불이 길게 이어졌다.
그는 내 옆에서 아주 조용히 말했다.


“당신, 혼자 있는 걸 잘하네요.”
나는 그 말이 칭찬인지, 관찰인지, 아니면 어떤 간절함인지 구별하지 못했다. 다만 겨울엔 사람의 말이 종종 의미보다 체온으로 먼저 다가온다. 그래서 나는 대답 대신 캔 커피를 들어 입술을 대었다. 뜨거운 액체가 목을 지나갈 때, 잠깐 살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잘하는 게 아니라…”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냥… 익숙해요.”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같이 건넜고, 건너는 동안 말이 없었다. 눈이 내릴 것 같은 냄새가 더 가까워졌다.
그는 한 번 내 쪽을 흘끗 보더니, 아주 작게 웃었다.


“익숙한 것들 중에, 꼭 좋은 것만 있는 건 아니죠?”
“…네.”
“그러면 나쁜 것도 아니겠네요.”
“…그럴지도.”


그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그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 같았다. 혹은 아주 오래전의 나를 닮은 사람 같았다. 겨울에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이런 착각이 생긴다. 추위가 사람을 더 솔직하게 만들기 때문인지, 아니면 더 외롭게 만들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길 모퉁이에서 그는 멈췄다.
“여기서 가야 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 손으로 종이컵을 감싼 채, 다른 손을 잠깐 망설이다가 내게 내밀었다.


“설탕, 조금 덜 달게 만드는 방법 알아요?”
“뭔데요?”
“천천히 마시는 거요. 급하게 마시면… 달기만 하고 끝나요.”


그 말은 커피 얘기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잡지는 않았다. 대신 손끝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짧게 웃었다.


“겨울엔 천천히가 더 어려워요.”
“그래도요.”
“그래도… 해볼게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나는 그의 뒷모습이 골목 끝에서 흐려지는 걸 잠시 바라보다가, 캔 커피를 다시 손바닥에 붙였다. 이제 캔은 뜨겁지 않았다. 미지근함은 늘 이상한 감정을 남긴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것들. 끝나지 않았는데 이미 끝난 것 같은 것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첫 눈이 아주 조용히 떨어졌다.
소리 없이 시작되는 것들은 대부분 오래 남는다.


나는 생각했다.
겨울의 아릇함은, 결국 녹아버리는 것들을 더 오래 붙잡고 싶어지는 마음에서 오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 마음은, 눈처럼.
조용히.
하지만 분명히.
내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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