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여성
현지에서는 보통 몸에 이상이 생기면, GP라고 불리는 의사에게 찾아가 진료를 받는다. GP의 규모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작은 진료소로 간단한 검사나 처치만 가능하고, 만약 조금 더 자세히 검진이 필요할 경우 진료의뢰서를 작성해 환자를 큰 병원으로 보내주기 때문에 많은 돈을 내고 사립병원에 방문하지 않는 이상은 큰 병원에 바로 방문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게 큰 병원에 방문해 검사를 받고, 의사를 만난 뒤 질병이 확진되거나 혹은 이상이 없다는 것이 판별되면 그때 환자의 상태에 따라 입원을 하거나 혹은 해당 병원에서 외래진료를 이어가기도 하고, 상태가 안정적이라면 GP로 환자를 돌려보내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도 한다.
위와 같은 절차로 환자들은 병원에 입원해 의료진을 만나게 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환자들은 이미 진단을 받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상태이기 때문에 극도로 슬픔에 잠겨있거나 불안해하는 경우는 그렇게까지 많지 않은 편이다. 몇 개월 전 처음 보게 된 환자가 있었다. 환자 R은 50대 중반의 여성이었는데, 최근 암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 상태였다. 방문을 열고 환자에게 들어서자 한눈에 봐도 매우 안절부절못해하는 환자를 볼 수 있었다. 나름대로 분위기를 전환해 보기 위해 환자에게 밝게 인사를 하고, 내 소개를 하며 하루동안 내가 기사처럼 지켜주겠다는 농담을 건넸다. 환자는 살짝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를 했지만 여전히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중이었다.
보통 환자들이 불안해하는 경우에는 미리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 지에 대해 설명을 해주면 도움이 되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에 환자에게 간단히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 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입원절차, 식사시간, 면회 시간 등등에 대해 설명을 해준 뒤, 환자에게 따뜻한 차와 비스킷을 가져다주었고 15분쯤 뒤에 혈액검사, 소변검사 등등에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해올 테니 차를 마시며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얼마 후 환자의 방에 들어가자 조금은 더 안정된 모습으로 환자는 차를 마시고 있었고, 이런저런 입원검사를 진행하며 환자에게 어느 동네에 사는지, 차를 좋아하는지 커피를 좋아하는지, 좋아하는 레스토랑이 있는지 등등에 대해 물으며 긴장을 더 풀어주려 노력했다. 환자는 살갑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고 조심스럽게 내가 한국인인지에 대해 물었다. 환자에게 어떻게 알았는 지를 물어보자 본인이 좋아하는 한국인 디자이너의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며 한국문화에 대해 알게 되었다며 그 한국인 디자이너의 인스타그램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수다는 한국음식, 그 디자이너의 색채감각, 인스타그램에는 온통 광고만 가득하다는 불만 등등 끝을 모르고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 수다를 떨고 환자 R은 내게 이름을 다시 물어보았고, 이름을 다시 한번 알려주며 내가 "한국이름이라 기억하기가 쉽지 않을 걸" 하고 장난스레 웃자 환자는 "아냐, 내가 완벽하게 발음해 줄게!"라고 하며 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을 마무리하고, 환자 R의 불안이 조금 사그라들었다고 생각하고 다음번 간호사에게 환자에 대해 인계를 한 뒤 퇴근을 했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출근을 했고 같은 환자를 담당하게 되었다. 환자의 방문을 열고 "굿 모닝! 오늘 컨디션은 어때? 밤에 잠은 잘 잤어?"라고 물어보자 환자는 내게 밤새 나를 기다렸다며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밤새 내 이름만 생각했구나!" 하자 환자는 깔깔 웃었다. 그렇게 근무를 하며 종종 환자의 방에 들어가 처치를 할 때마다 환자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다양한 주제들로 수다를 떨었고, 환자는 내게 사실 몇 개월 전 직장 동료가 똑같은 질병으로 투병을 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해주며 그 생각에 종일 불안했었다고 말했다. 나는 이제 갓 진단을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치료경과를 봐야 알겠지만, 많은 환자들은 회복해서 집으로 돌아가니 치료를 잘 받아보자고 말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환자는 종종 가족, 친구들과 전화와 메시지를 하며 하루를 보내는 듯했다.
그리고 며칠 뒤 근무에 복귀해 다른 환자들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렇게 바쁘게 업무를 해나가던 중 브레이크 시간에 동료 간호사들과 환자 R의 여동생의 남편이 아침에 침대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인에 대해서는 아직 조사 중이지만 그 사실 때문에 환자 R의 불안이 진정되는 듯하다가 다시 시작된 것 같다며 정신과적인 상담을 요청해 둔 상태라고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