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여성
소식을 듣고 환자에게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지만 유달리 업무가 바빠 환자 R에게 인사도 나눌 시간을 빼기 어려웠다. 그렇게 정신없는 하루가 지나고 다시 얼마 후 내가 환자 R을 담당하게 되었다.
방에 들어가기 앞서 환자가 먼저 언급을 하지 않는 이상 모른 체하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 R을 보게 되었다. 환자 R은 나를 보자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해주었다. 나 역시 웃으며 "얼굴을 본 지가 벌써 꽤 되었네! 어떻게 지냈어? 요즘 식사를 잘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식욕은 어때?"라고 물었다. 환자는 간단히 식욕, 컨디션 등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해주었고 환자의 몇 가지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해주며 간단한 스몰토크를 이어나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중 환자에게 물었다. "병원 생활이 길어지고 있는데 그건 어때? 지루하지는 않아?" 그러자 환자는 "가족들, 친구들을 자주 못 보는 게 슬프지만 괜찮아 어쩔 수 없지"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조금 뜸을 들인 후, 내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얼마 전에 여동생의 남편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어. 아침에 자고 일어나니 사망을 한 상태였대.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지만 나도 아프고, 또 그런 일이 생겨서 가족들에게 힘든 시기가 온 것 같아."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환자는 바로 "내 주변에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아서 무서워. 나 괜찮겠지? 잘 극복할 수 있겠지?"라고 물었다.
환자는 처음 입원을 했을 당시에도 직장동료가 같은 질병으로 세상을 떠난 일에 대해 불안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최근 일어난 일에 대해 더욱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 듯했다. 또한, 환자가 입원치료 중이기 때문에 가족들은 상세한 내용을 알리지 않는 듯했었다. 환자에게 "너무 당황스러웠겠다. 여동생은 괜찮아? 아직 무슨 일인 지 알지 못하니 더 혼란스럽겠다.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는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고 검사를 받아가면서 치료를 하고 있기 때문에 잘 먹고, 잘 자는 것에 조금 더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병원 바깥일에 대해서는 지금은 가족들에게 맡기자. 그렇지만 혹시라도 걱정이 되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 콜벨을 눌러도 좋아."라고 말했고, 환자는 고맙다고 이야기했지만 여전히 불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순간 어떻게 환자를 안심시킬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당장 마법처럼 환자의 불안감을 해소해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었기 때문에 환자에게 말했다. "한국에서는 장수를 상징하는 열 가지가 있어, 그중 하나가 거북이야. 내가 행운의 거북이를 그려줄게. 이 거북이가 지켜줄 거니까 걱정하지 마 “ 그리고 벽에 걸려 있는 화이트보드에 웃고 있는 거북이 그림을 그렸다. 환자는 웃으며 ”너 말대로 거북이가 나를 지켜줬으면 좋겠어. 정말 고마워 “라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듣기로는 환자는 몇 차례 방에 방문한 다른 스태프들에게 거북이 이야기를 했고 몇몇에게는 거북이가 작은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병원에서 근무를 하다 보면 심적으로 버거운 상황을 종종 마주하고는 한다. 처음 학교를 졸업하고 갓 간호사가 되었을 때에는 고작 만 23살의 나이였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참 부담스러웠다. 어떤 말을 해줘야 하는지, 심지어는 어떤 표정과 반응을 해야 하는지 조차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종종 환자의 슬픔을 내가 한가득 껴안고, 집까지 가지고 와 하루종일 슬픔에 잠겨있기도 했던 적이 있다. 여전히 많은 것들을 보고 또 배워야 하겠지만, 가끔은 이런 작은 일들이 의외로 도움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