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친애하는 나의 아버지, 그를 위한 위로
상주(喪主)의 가장 최측근으로 상(喪)을 치른 횟수
3년 내 3회, 2020년 올 한해만 2번.
내 팔자도 기구하다 기구해,라고 말할 법한 마지막 한 번이 얼마 전 일어났다.
바로 나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일이다.
지난 11월 7일 토요일.
아빠로부터 장례식장 전화번호를 묻는 전화를 받았다.
아마 아빠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먼저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늘 그랬듯 돌직구를 모르는 그는 얼마 전 내가 장례를 치렀던 장례식장 번호를 물으며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묵직한 변화구를 던졌다.
늘 그랬다.
묵언 수행이 취미이고 선문답이 특기인 충청남도 양반의 피가 흐르는 나의 아버지는
돌직구 따위는 그의 삶에 없었으며 항상 정직한 변화구로 승부하는 본 투 (born to) 충청도 양반이었다.
여하튼 장례식장이 정해지고 상복(喪服)을 챙겨입을 때,
아빠는 이야기했다. 머리에 꽂을 핀은 어디 있냐고.
그때, 나는 아빠에게 이야기했다.
아빠, 아직 입관식 안 했잖아.
돌아가신 거 아니라고.
지금은 절도 2번 하는 거 아니야.
나 올해만 상주(喪主) 2회차,
아빠보다 노하우가 넘쳐.
상주(喪主) 경험 플렉스(flex)로 그제야 난 아빠를 웃게 할 수 있었다.
효녀이기보단 불효녀로 살아온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그렇게나마 내가 아빠를 웃게 할 수 있었으니
아빠보다 풍부한 상주(喪主)경험도 괜찮았다.
그의 어머니는 치매로 얼마 간을 고생하다 결국 요양원으로 가게 되었고
마지막엔 제대로 음식물을 넘기지 못해 요양원에서 감당할 수 없어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결국엔 여느 노환의 환자와 마찬가지로 중환자실 신세를 지다 소천하였다.
세례명 마리아인 그녀의 삶은 그렇게 끝이 났다.
다만 세례명 마리아인 그녀의 장례식에 성가는 단 한 번도 울려 퍼지지 않았다.
고인명 앞에 세례명이 적혀있지만,미사는커녕 성가도 울리지 않는 장례식.
앞부터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나의 아버지는 본투(born to) 충청도 양반이라고.
아빠는 젊었을 적부터 예수쟁이들의 장례식은 멀뚱히 서 있어야 하는 게 고역이라며
상(喪)을 치르는 것 같지도 않다고 말하던 꼬장꼬장한 선비 중의 선비였다.
그런 나의 아버지가 할머니의 장례미사를 집전한다는 건
목사님 장례식에 목탁 소리 나는 것보다 더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되려 내가 놀라웠던 것은 내가 초등학교 때쯤 할아버지 산소를 이장하면서 미리 할아버지 옆자리에 마련해둔 할머니 자리에 매장이 아닌 화장을 해서 모신다는 것이었다.
요즘 세상 누가 매장을 하냐고 하지만 우리 집안 선산에는 매장을 하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편으론 꽉 막혀 있으면서도 한 편으론 깨어 있는 면이 있기도 한
나의 아버지는 이른 나이인 9살에 그의 아버지를 여읜 후 예순이 넘어서야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렀다.
나의 아버지는 9살이란 나이에 상주(喪主)되었고 50여 년이 지난 후에 한 번 더 상주(喪主)가 된 것이다.
이런 순간 나는 생각한다. 진정 삶이란 이런 것이 아니겠냐고.
근 3년 이내에 3번이나 상주(喪主)의 최측근이 된 딸과
너무나 이른 나이에 하지 않아도 될 경험을 하고 50여 년이 훌쩍 지나
장성한 아들(=내 남동생새끼)과 나란히 상주(喪主)가 된 아버지가 한 가족인 것.
딸이 아빠에게 요즘 장례식 상주(喪主)의 애티튜드를 알려주는 것이 가능한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사(人生事) 아니겠냐는 말이다.
대게 우리 아빠 세대의 장남에게는 책임감과 함께 특권 비슷한 것이 함께 부여되었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정말 운이 나쁘게도 책임감만을 부여받았다.
9살 무렵 나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며 주어진 의무와 책임에서 여태껏 자유롭지 못했다.
아마 나의 할아버지가 10년, 아니 5년만 더 살아주셨다면 그의 삶은 지금과 사뭇 달랐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나의 할머니는 아들인 우리 아빠에게 그다지 좋은 엄마도 손녀인 나에게 그다지 좋은 할머니도 아니었다.
그리고 정말 너무나 당연하게도 며느리인 우리 엄마에겐 최악의 시어머니였다.
(엄마의 개인사이니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점 양해 바랍니다. 어느 집에서나 뻔한 고부 간의 그런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엄청나게 부지런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꽤 젊은 나이이지만 시골에 땅도 많이 샀고 그 땅에서 농사도 잘 지어 수입이 좋은 농부였다고 한다.
그리고 아빠의 기억 속 행복한 순간 하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할아버지 지게 위에 아빠를 위해 산에서 딴 열매들이 항상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왼손잡이인 아빠가 무의식 중에 밥상 위로 왼손을 먼저 올릴때면 손등이 빨개지도록 매섭게 내리쳤다던 나의 할아버지는 지게 위 열매로 아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던 것이다.
반면, 나의 할머니는 생활력이 강하지도 않았고 손이 야물어 살림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이제 막 9살이 된 아들에게도 그렇게 보이고 기억될만큼 그녀는 매사 느렸고 함께 살던 그녀의 시어머니인 아빠의 할머니와 성향이 전혀 달랐다고 한다.
이렇게 누구의 처지에서 생각해도 노답이고 모두가 불쌍한 상황이 발생하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몸과 마음이 고달파지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단정 지어서 말할 순 없지만, 대게 그 사람은 그중 가장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거나 그 상황이 답답해 견딜 수 없는 성질머리 급하고 더럽다 일컬어지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팀플레이 무임승차가
가족 안에서도 이루어진다는 것은
우리가 입 밖에 내길 꺼려 했을 뿐,
잔혹한 사실이다.
여하튼, 시골 땅에서 농사지어야 먹고 살 수 있었지만, 그것에 재주도 흥미도 없었던 나의 할머니 덕분에
아빠는 중학생이 됐을 즈음부터 직접 농사일을 하기 시작했고
큰아들은 그렇게 장정들이 매달려도 하기 힘든 농사일을 시작했건만 큰아들 아래 두 딸은 여자니까 힘든 일을 할 수 없었고 막내아들은 어려서 더욱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덜 아픈 손가락 법칙은 우리 아빠에게도 해당하는 것이었다.
젠장 '◡'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9살의 어린아이는 한순간에 호주(戶主)가 되었고 그 책임과 의무는 생각보다 가혹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진학한 대학교는 1년 남짓 다녀본 것으로 만족하며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군 제대 후 곧바로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했던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의 우리 아빠.
두 여동생의 결혼식과 남동생의 뒤치다꺼리를 책임지느라 늘 큰돈이 필요했던 나의 아버지.
그렇게 떠밀리듯 시작한 사업이 IMF 위기를 맞이해 휘청거렸지만 꿋꿋하게 이겨낸 나의 아버지.
언젠가 그는 그때를 이야기하며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밤에 잠이 들 때면 아침에 눈 뜨는 것이 참 두려웠었다고.
엄마는 늘 그의 건강을 걱정하며 권유를 가장한 강요로 금연을 항상 이야기했지만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처음 아빠를 이해하게 된 것은 담배를 피우는 마음이었다.
술을 단 한 잔도 못 하는 그에게 그나마 담배가 답답한 속을 달래주는 친구였길 바랄 뿐이다.
이번 일로 나는 아빠가 더이상 내 기억 속 마흔살 즈음
검은 머리카락의 멋진 수트핏을 가진 그때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체감했다.
우리 아빠는 내 아들의 할배가 되었고 자식 앞에서 눈물을 숨기지 못할만큼 약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관공서며 은행이며 일 처리 하나 빠짐없이 똑 부러지게 해내던 예전의 정 사장님, 나의 아버지는 어느덧 나와 함께 동사무소에 가는 것에 혼자 갈 수 있다거나 필요 없다는 군소리 하나 없이 함께 길을 나섰고 그 모습을 보고 엄마는 너희 아빠도 진짜 늙었나 보다라며 씁쓸해했다.
이렇게 또 나와 가까운 30년대생인(정확히는 35년생) 할머니도 올해, 세상을 떠났다.
나는 왜 30년대생들의 죽음과 이렇게 가까이하고 있을까.
또 그렇게 가까운 위치에서 있으면서도 그들의 죽음에 슬퍼하지 못할까.
전생에 나는 30년생 누군가에게 밀고를 받은 독립운동가라도 됐던 걸까?
누군가에겐 할머니가 엄청난 그리움의 존재,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존재이겠지만 아쉽게도 나에겐 친할머니·외할머니가 심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멀리 계셨다.
친할머니는 그녀의 외손주들을 키우느라 바빴고 외할머니는 물리적으로 거리가 멀어 1년에 한번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그렇기에 내가 친할머니를 위해 무언가 했던 일은 단지 하나뿐이고 그래서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대학교 다닐 때였는데 손이 불편해 젓가락질이 힘드니 약간 무게감 있는 포크를 쓰시게 하면 좋겠다는 엄마의 말이 생각나 남대문시장 근처에 간 김에 적당한 무게감의 스테이크 포크를 사서 엄마·아빠가 나란히 앉아 있던 식탁 위에 툭 올려놓으며 "할머니 포크 필요하다매"라고 말했다.
그 후에 엄마에게 전해 듣기론 아빠가 참 고마워했다고 들었다. (그게 뭐라고 나 참)
내가 평생에 걸쳐 한 건 단지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삼우제 때 예쁜 조화를 골라 엄마 편으로 보냈다.
해준 게 딱 하나뿐이면 좀 그러니까.
2020년은 이렇게 상주(喪主)의 최전방에서 2번을 보냈다.
그렇게 보내고 나니 벌써 크리스마스가 코 앞이다.
오늘 밤은 누군가 맛있게 만들어주는 뱅쇼 한잔으로 조곤조곤 수다를 떨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다.
비록 현실은 그렇지 못해 아쉽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