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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결국 Jan 07. 2021

육회 한 접시로 감성팔이가 가능했던 날.

Feat. 좋았던 순간이 문득 떠오를 때. 

늦은 아점으로 하루를 또 정신없이 보내고

남편ㄴ.......은 늦는다고 했고 (거리 두기 2.5단계이고 너는 의사도 간호사도 아닌데 왜 늦는 거니?)

아드님의 저녁상까지 해결하고 나니 단백질 보충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카드값에서 그 비중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익숙한 그 이름 우아한형제들.


요즘 가장 많이 사용하는 앱인 배달의 민족을 켜니 딱 적당하게 혼자 먹을 수 있는 육회 가게가 나온다.

바로 이것이구나 싶어 부리나케 주문했고 정말 딱 내가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적당량의 1인분이 도착했다.

반 정도는 아무 생각 없이 맛에 취해 흡입했던 것 같고 어느 정도 배가 차니 육회와의 추억이 떠오른다.



사람은 말년 운이 좋아야 한다고 하는데 말년 운보다 초•중년 운이 좋은 아버지를 둔 덕분에 그리고 자식을 최고로 생각하는 아버지 덕분에 나는 꽤 유복한 환경에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래, 뭐 이 기회를 빌려 플렉스(Flex) 하나 하자면 
나는 초등학교 때, 가족끼리 외식할 때는 먹는 고기는 
당연히 소고기인 줄 알았다.

내가 처음 육회를 접한 날은 동생이랑 회를 먹으러 가냐 고기를 먹으러 가냐로 서로 징징거리다 결국 고기를 먹으러 간 날이었을 거다. 

아마 이런 상황을 두고 안 봐도 비디오라고 할 만큼 연년생인 남동생새끼와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나의 친애하는 적(敵)이자 적(籍)이었다. 


나는 회를 좋아했고 동생은 고기를 좋아해서 메뉴 다툼은 외식할 때마다 흔하게 생기는 티격태격 중 하나일 따름이었고 그날은 남동생새끼 목소리가 컸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입이 짧아 엄마·아빠의 걱정을 사는 나였으니 깨작거리는 내가 아빠는 안쓰러웠을 것이고 순간 이거다 싶었던 것이 '육회'였던 것이다.

엄마는 먹을 수 있겠냐며 기겁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기우(杞憂)'였다.


육회는 신세계였다

그 이후로 우리의 메뉴 다툼은 사그라들었고(여느 집 현실남매가 그렇듯 싸움이 아예 없어지는 일은 없으니) 나는 우리 가족에겐 육회 하면 생각나는 No.1이 되었다. 




그 후로 2~3년은 자주 외식을 했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 그 대단한 IMF라는 단어가 나타나 잠깐의 어려움이 지나가고 다시 소고기 외식을 즐길 수 있었을 때 우리 남매는 초등학교 때처럼 단순한 티격태격을 할 수 없는 격변의 중•고등 시기를 보내고 있었고 남동생새끼는 고등학교 남자아이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식신능력을 맘껏 뽐내며 안창살 8인분을 혼자 처먹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나름의 추억이 있는데 아직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당시 엄마가, 아빠가 우리가 먹던 음식을 우리만큼이나 좋아서 먹었는지 엄마, 아빠가 제대로 고기 한 점 먹기나 했는지에 대한 것이다. 


마치 지금 내가 아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에 마음이 뺏겨 먼저 부지런히 먹인 뒤에 후루룩 밥을 마시는 것처럼 우리 엄마아빠도 그랬을 것 같은데 그것마저도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난다. 


자식은 늘 아홉을 뺏고도 하나를 더 달라고 조르는데 
부모는 열을 주고도 하나가 더 없는게 가슴 아프다.

⌜동백꽃 필 무렵⌟ 에서 날 울렸던 그 대사가 생각났다. 

육회 한 접시로 괜스레 감성팔이가 가능해진 건 다 이 망할 놈의 코로나 때문이다.

코로나 블루가 잠시 잠깐 나에게도 찾아오긴 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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