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성립하여 기원전 108년에 멸망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드넓은 만주와 한반도에 고조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록에 남았든지 그렇지 않았든지 간에 여러 소국(小國)이 생멸(生滅)했을 것이다.
기록으로 남은 국가로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마한, 진한, 변한 등이 있다. 우리 기록뿐만 아니라 중국 기록, 특히 진수(陳壽, 233~297)가 지은 '삼국지'는 이들 국가에 대한 보물 창고다. 진수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만주와 한반도에 존재했던 여러 나라의 문화를 소개한다. 내용이 촘촘하여 신뢰 높은 자료로 인식되지만, 중국이 변방 지역에 관한 통치 목적으로 꼼꼼히 조사한 결과라고 생각하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다.
여기서 주목되는 국가는 부여다. 송호정 교수에 따르면, 부여는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494년까지 북만주 지역에 예맥족이 세운 고대국가다. 기원전 3세기에 성립하였다면 고조선과도 공존한 것이다. 494년은 고구려의 전성기로, 3세기부터 위축되었던 부여를 고구려가 편입하면서 부여는 멸망하였다. 그래도 700년을 존속하였으니, 시기로만 보아도 고구려, 백제, 신라에 비해 초라하지 않다.
부여는 고구려의 기원이기도 하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은 부여에서 내려와 기존 세력과 통합하여 고구려를 세웠다. 주몽의 고구려 전에도 고구려는 있었으며, 이를 편의상 '원시 고구려'라고 한다. 부여는 '사슴'을 가리키는 만주어 '부위'와 비슷하다. 따라서 부여는 사슴을 토템으로 하는 국가였다고 생각된다(송호정의 견해). 사슴은 소만큼 크고, 말처럼 빠르고, 온순하면서도 굳세다. 부여와 많이 닮았다.
부여는 만주 쑹화강을 거점으로 성장하였다. 쑹화강 지역은 넓은 평야가 펼쳐진 땅으로, '삼국지'에서는 부여를 오곡(오곡, 쌀, 보리, 콩, 조, 기장)에 적합하다고 표현하였다. 따라서 부여는 농업을 중점으로 한 국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유목 민족의 기질도 무시할 수 없다. '후한서'에는 부여인이 큰 체형을 지녔으며, 기질이 용감하고 사나웠다고 한다. 그리고 형사취수혼(兄死聚嫂婚)이나 순장(殉葬)과 같은 유목 민족의 문화도 나타난다. 날랜 기병을 보유하고 군사력이 강하여, '삼국지'에는 "부여가 아주 부유했고, 3세기 중엽까지 한 번도 이웃 나라의 침략으로 파괴된 적이 없었다"라고 적었다.
부여는 5개 부족이 연합한 정치 조직을 가졌다(5부족 연맹체). 각 부족은 '가(加)'라고 불렸고, 말, 소, 개, 돼지 등 짐승 이름을 딴 점이 독특하다. 각 부족장은 저마다 관리를 두고, 독자적인 지역을 다스릴 만큼 권력이 강하였다. 여러 부족 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매년 12월마다 영고(迎鼓)라는 제천 행사를 거행한 점도 흥미롭다. 국가법은 고조선처럼 매우 엄했다.
그러나 부여는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고구려도 여러 부족이 연맹하여 구성되었으며, 부여에서 내려은 주몽이 권력의 선두에 서면서 계루부 중심의 국가 체제를 굳건하게 마련하였다(참고로 주몽은 고씨로, 고구려 왕조는 고씨 왕조이다). 고구려는 고조선 멸망 후 한 군현(중국 한(漢) 왕조가 설치한 간섭 기구)을 정복하면서 성장하였다. 매년 10월에 동맹(東盟)이라는 제천 행사를 가졌다.
옥저와 동예는 각각 오늘날 함경도와 강원도에 터전을 잡아 성장한 국가로, 왕이 없고, 군장이 통치하였다. 동예는 매년 10월에 무천(舞天)이라는 제사를 지냈다.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성장한 마한, 진한, 변한을 삼한(三韓)이라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토착 세력이겠지만, 위만이 권력을 잡으면서 남쪽으로 이주한 세력도 상당수 있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고조선의 준왕 세력은 한반도 남부로 이주하면서 '한(韓)'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었고, 오늘날 청주 한씨의 계보를 만들었다고 짐작된다. 삼한은 제사와 정치가 분리된 사회라고 하며, 철기 문화가 발달하여 농업이 성행하였다. 그래서인지 5월과 10월, 일 년에 두 번 제사를 지냈다.
고조선이 멸망한 후 만주와 한반도에서는 여러 나라가 서로 경쟁하고 교류하면서 공존하였다. 공존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성장하면서 재편되었지만, 이들도 공존하였으니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