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본래 ‘십제(十濟)’였다고 한다. 점차 국가 체제가 발전하면서 십(十)이 백(百)이 되었다. 지금처럼 GDP(국내총생산) 개념이 있었다면, 백제는 단연코 삼국 중 1위였을 것이다. 일찍부터 한강을 바탕으로 성장하면서 비옥한 한반도 남부 지방을 터전 삼아 농업과 무역업을 일구어내어 풍요로웠다. 아울러 정치 체제도 안정되었으니, 우리가 흔히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고 평가하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다.
백제는 고구려계 이주민인 온조와 비류가 남쪽으로 내려와 기존 한강 토착민과 결합하면서 성립하였다(기원전 18년, 삼국사기). 이때, 한강 토착민은 옛 진(辰)국의 후예들이다. 온조와 비류는 부여계 이주민인 고주몽과 소서노 사이에서 태어난 형제였으므로, 부여계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래서 백제 왕족은 ‘부여 씨(扶餘氏)’다. 고구려 초기의 무덤 양식과 백제의 무덤 양식이 비슷한 것도 같은 줄기에서 왔음을 방증한다.
백제는 고이왕(234~286) 때 한강 유역을 장악하고, 관직 체계를 정비하면서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근초고왕(346~375)은 왕위의 부자 상속 체제를 확립하여 내치(內治)를 굳건하게 하고, 영토를 확장하며 대외적 영향력을 펼쳤다. 또한,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한 것은 백제의 국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고구려 고국원왕이 전사하면서 고구려는 큰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고구려에는 소수림왕이 있었다). 한강을 바탕으로 중국과 교역하고, 특히 일본 규슈 지역에도 문화를 전파한 것은 백제의 힘이었다.
그러나 5세기 들어서 고구려가 백제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마치 100년의 복수라도 하듯,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을 공격하여 백제 개로왕(455~475)를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온 것은 고구려가 한반도의 패자로 등극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삼국사기’를 보면 개로왕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특히 장수왕이 백제를 치기 위해 간첩 도림(道琳)을 보내 성(城)을 새로 쌓고 궁궐과 누각을 화려하게 지어 백제의 창고가 비고, 백성을 곤궁하게 만든 뒤 군사를 얻어 백제를 공격하는 장면은 꽤 인상적이다. 이후 백제는 웅진(지금 공주)으로 도읍을 옮겨 고구려에 한강 유역을 내어주게 된다.
6세기는 백제가 다시 부흥하는 시기다. 1971년, 공주에서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무령왕릉이 발견되었다. 6세기 백제 부흥은 왕릉의 주인공 무령왕(501~523)에서 시작한다. 예로부터 백제에는 ‘팔대성(八大姓)’이라 하여 귀족의 힘이 강했다. 백제 왕실이 정치를 독점하고 집권적인 힘을 누리려면 귀족들을 통제해야만 했다. 22개 담로에 왕족을 파견한 것은 귀족 세력을 누르고 중앙 집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무령왕의 맏아들 성왕(523~554)은 사비(지금 부여)로 천도하고, ‘남부여’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 남부여는 ‘남쪽의 부여’라는 뜻이므로, 옛 부여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성왕의 의지였다. 성왕은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회복하기에 이른다(551). 백제는 433년에 고구려의 남진에 대응하기 위해 신라와 동맹을 체결하였는데, 그 효과를 비로소 얻은 것이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은 백제 동북쪽 변경을 공격하여 ‘신주(新州)’를 설치했고, 왕녀를 신라에 시집보냈다(삼국사기). 1년 후 성왕은 신라를 치려고 보병과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공격하였으나, 매복한 적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 무령왕릉과 관련해서는 '랄라라의 브런치스토리(랄라라의 브런치스토리)>톺아보는 문화유산>무령왕릉 진묘수의 부러진 다리'가 흥미롭다.
성왕 전사 직후 백제는 꽤 혼란스러웠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러나 백제는 7세기에 들어 무왕과 의자왕으로 이어지며 다시 부흥을 여는 분위기다. 무왕은 ‘서동요’의 주인공인데, 중국 당에 조공을 바쳐 관계를 돈독히 하는 등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 노력한 모습이 보인다. 이어 즉위한 의자왕은 행간의 소문과는 달리 ‘의롭고 자애로운(義慈)’ 왕이다. 궁녀를 3천 명이나 데리고 다니며 방탕한 주색잡기에 빠질 만한 인물로 한정할 수는 없다. 의자왕은 군사를 일으켜 접경지인 신라 대야성을 빼앗고, 김춘추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으니, 백제를 쉽사리 사그라들 게 만들 군주가 아니다. 역사의 승자가 깡패일 뿐이다.
그러나 김춘추는 대야성 함락의 일을 기화로 결국 당과 동맹을 체결하였으니, 신라와 당의 연합군은 가장 먼저 타겟을 백제로 정하고 기벌포와 황산벌에서 백제군과 맞섰다. 5천 명 계백의 결사대는 5만의 연합군을 맞아 처절하게 싸웠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고,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678년 백제 왕국의 역사는 막을 내린다. 멸망 직후 주류성의 복신과 도침, 임존성의 흑치상지가 이끄는 백제 부흥 운동은 무엇을 위한 움직임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