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클레스
비극이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소재는 아니다.
비극보다는 희극,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이 좀더 대중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드라마나 승리하는 영웅들이 나오는 영화, 누군가의 성공담을 담은 에세이가 인기인 것만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기원전에는 비극이 상당히 인기였던 듯하다.
무려 비극 경연 대회가 있었고, 인기리에 무대를 상연했으며, 그 대회에서 20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명성을 떨치는 작가들이 나왔으니 말이다.
소포클레스도 그 작가들 중 하나다.
‘오이디푸스 왕’을 읽어보면 그의 희곡이 왜 그렇게 인기였는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약 100쪽에 달하는 분량이 숨 쉴 틈 없이 몰아친다. 오이디푸스가 도시를 구하기 위해 한 노력이 첫 단추가 되어 그를 돌이킬 수 없는 참혹한 진실로 이끈다. 결국 자신의 운명에 몸서리치던 오이디푸스는 스스로의 눈을 찔러 눈을 멀게 하고, 처남에게 부디 자신을 이 땅에서 추방시켜 달라고 울부짖는다.
비극이 더욱 안타까운 이유는 비극의 주인공이 악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백성의 아픔을 제 영혼의 고통으로 생각하는 왕이었으며, 자신이 죽었을 때 저승에서조차 부모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제 눈을 찌른 자식이었고, 고통에 울부짖는 와중에도 저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손가락질당할 자식들을 가여워하는 아버지였다. 그의 불행은 극에서도 절절하게 묘사된다.
“대체 내가 무엇을 볼 수 있고, 무엇을 사랑할 수 있으며, 어떤 인사를 받은들 아직도 즐겁게 들리겠소, 친구들이여? 나를 얼른 이 땅 밖으로 이끌어 내 주시오. 이끌어 내 주시오, 오, 친구들이여, 가장 저주받고 크게 파멸한 인간들 가운데서도 신들께 가장 미움 받는 나를.”
“내 그때 죽었더라면 친구들과 내게 이리 큰 고통은 되지 않았을 터이니! 그랬더라면 아버지의 살해자가 되지는 않았을 것을! 또 사람들 사이에서, 내 어머니의 배우자라 불리지도 않았을 것을!”
“내가 앞을 본다면, 하데스의 집에 이를 때 대체 어떤 눈으로 아버지를, 또 불행한 어머니를 보아야 할지 내 알지 못하기 때문이오. 이 두 분께 한 짓은 내가 올가미로 죽어 갚을 수 있는 것보다 더 크다오.”
이전까지는 틀림없이 행복이었던 모든 것들이 하루만에 가장 끔찍한 재앙이 되었다. 부모도, 아내도, 자식도, 테베의 왕이라는 자리까지도 그에겐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되었다. 그러니 그의 고통은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고통일 것이다.
비극에서 묘사되는 고통은 이처럼 순수한 고통이다.
고통은 슬픔이고, 괴로움이고, 안타까움이고, 안쓰러움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권선징악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고통, 즉 통쾌함을 위한 고통과는 다르다.
악인이 끝내 죗값을 받고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을 보면 독자들은 통쾌함을 느낀다. 주인공이 겪는 고통조차 이후에 이어질 복수를 더욱 극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권선징악의 이야기가 교훈을 담고 있기에 그렇다.
‘선한 자는 복을 받을 것이고 악한 자는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 착하게 살아라.’라는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그리고 그렇게 되길 바라는 수많은 보통의 사람들을 위해 이런 이야기는 널리 퍼진다. 그러나 때로는 선한 자들도 불행하게 삶을 마무리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가정을 꾸리고 오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예고 없이 불행이 닥칠 때가 있다. 그리고 도무지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아등바등 노력했던 것들이 소용없게 되기도 하고, 나를 괴롭히던 이가 승승장구하기도 하며, 갑작스러운 사고로 가정이 망가지기도 한다.
그럴 때 애써 긍정적으로 사건을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내 자신이 단단해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단단해지는 것은 그런 사건들이 반복되고, 살다 보면 때로는 내 인생에 비극이 닥칠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이다.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에서 빅터 프랭클은 말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느냐이다, 라고.
비극도 삶의 요소 중 하나라고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비극 속에서도 삶을 이어 나갈 수 있고 나를 성장시킬 수 있다. 비극을 통해 내가 배우는 것은 삶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겸허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