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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짝이는 루작가 Aug 27. 2024

팩폭 한방을 날린 남편

남편에게 가계 경제권을 넘기다

여보는 글을 쓰라고 응원했던 남편이 팩트폭력을 날렸다. 차가운 표정, 낮은 목소리, 빠른 스피드로 싸우는 듯 아닌 듯 얘기하는 우리 주변에서 어쩔 줄 몰라 붕붕카만 타는 아이들. 어렸을 적 부모님 싸움에 눈치 보던 어린 내가 함께 보였고, 현재 내 모습에선 폭발하는 화를 꾹꾹 누르며 얘기하는 엄마가 보였다. 그 때나 지금이나 죄인은 남편이라 말하고 싶은 아내의 하소연을 적어본다.


지난 수요일부터 둘찌의 설사로 가정보육을 이어갔다. 감기가 아닌 장염은 아이도 부모도 더욱 힘들게 했다. 안 좋은 컨디션을 맛있는 간식으로 달래지도 못했고, 기름기가 없고 차갑지 않은 음식들로 삼시세끼 지루하지 않게 간식까지 생각해 내느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지사제와 복통약은 1시간 차이를 두고 먹여야 하는 데다 식전에 먹는 걸 권장해 복용시간도 체크해야 했다. 몇 시에 뭘 먹었고 무슨 약을 먹었고 어떤 변을 보았는지 다시 신생아로 돌아간 듯 매 순간 기록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남편은 열심히 돈을 벌고 회사생활을 했다. 이번에 회사 홍보로 찍은 인스타 영상 조회수가 높아 기분도 좋아 보였다. 퇴근하고 틈틈이 아이들을 돌봤지만 자질구레하고 자잘하고 말하기 구차스러운 것들은 내 담당이었다.


돈 씀씀이도 그러한 것 같다. 남편은 마통에서 큼직큼직한 돈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움직임을 보며 지냈고, 나는 '여기에 이만큼 썼어요'라고 말하기엔 너무도 소소한, 너무나 일상적인 것들의 지출을 기록하며 지냈다. 그러다 결국 어제 서로 쌓여온 것들이 터졌다.


둘찌가 낮잠 잘 때 <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라는 책을 펼치며 읽었는데 내용이 너무 좋았다. 아이들을 마음껏 놀게 해주고 싶었다. 놀이밥을 먹게 해 줄 수 있는 나이는 지금 이 시기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돌아가신 외할머니댁이 생각났다. 육지에 계신 외삼촌이 관리하는 별장 같은 집. 외삼촌 식구들이 올 때는 2층을 쓰고, 지인들이 올 때면 1층을 빌려주고 계셨다. 삼촌께 여쭤보고 가능하다면 주말마다 우리가 그 집으로 놀러 가 지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캠핑대신 그곳에서 머물며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날씨와 자연을 친밀하게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밖으로 나왔을 때 풍기는 풀내음을 맡고, 가까이 다가가면 더 반짝이는 새벽이슬을 보면서. 눈앞에서 힘차게 쏟아붓는 비를 멍 때리며 바라보고, 따뜻한 햇살을 온몸으로 받고 책을 읽으면서.



모르겠다. 내가 너무 이상에 젖은 건지도. 그러나 아이들에게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주기에 이만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집에 들어가는 순간 외식 금지, 배달음식 금지. 우리가 장본 것들로 즐겁게 요리하고 음식을 나르고 맛있게 먹고. 주말 동안 키즈카페나 다른 곳에 쓰는 비용을 여기서 머물면 절약할 수 있겠단 생각도 들었다. 비록 집세는 삼촌과 의논해봐야 하고, 사실 빌려주실지 아닐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다. 그래서 남편에게 저녁에 넌지시 이야기를 던졌다.


"여보, 우리 그 할머니집~~ 한 번 주말마다 가서 살아볼까요??"

"갑자기 왜 그 생각을 했는데요?"

"아니~~ 내가 오늘 책을 읽는데 아이들에게 마음껏 뛰고 노는 데 좋을 것 같아서요! 주말만이라도~~"

"그럼 집세는 어떻게 할 건데요? 우리 지금 마이너스 통장이 얼마나 차고 있는지 알죠?! 지금 이자내는 걸로 모자라 또 이자를 만들겠다는 거예요? 이제 마통도 다 차면 더 이상 돈을 융통할 데도 없는 거 알죠? 지금 이 생활패턴만으로도 갚지 못하면서 어떻게 이게 가능하다는 거예요??"


...


중치가 막혔다. 순간 큰 돌덩이 하나가 내 가슴을 누르는 듯했다. 아직 외삼촌네랑 얘기를 해 본 것도 아니고, 빌려주실지 말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냥 한 번 내가 생각했던 이상을 남편과 같이 즐겁게 상상하고 그것이 현실이 되면 좋겠다 의논하고 싶었는데. 이렇게도 강하게 팩트 펀치를 날리다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 얘기도 하기 싫었다. 남편의 말이 맞다. 그래 사실이다. 그런데 돈이야 외삼촌이기에 빌려 쓰라고만 허락해 주시면 다달이 갚아도 되는지 여쭤볼 수도 있는 거고 맞벌이하며 후불로 내겠다 양해를 구할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나 역시 공짜로 신세를 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고, 그저 돈보다 지금은 아이들에게 더 즐거운 가치를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남편이 자꾸만 전부터 본인은 월급의 끝전 하나 안 떼고 나에게 보내는데 모아지는 돈이 하나도 없다며, 가계 경제에 불만을 가졌던 게 떠올라 9월부턴 경제권을 가져가라고 했다. 저녁마다 무얼 해 먹을까, 주말에 식사는 외식을 해야 하나 집에서 만들어먹어야 하나 매 끼니를 걱정하며 장보고 나오면 10만원이 넘는 비용에 늘 속상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이 좋아하는 비싼 과일과 고기들을 집어드는 나였다. 그런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시장을 보다 돈이 모자라면 어쩌냐고 물으니 생활비를 정해뒀으면 그 안에 맞추도록 살아야 되는 게 아니냐고 했다. 숨만 쉬어도 나가는 돈을 제외하고 생활비는 80만원으로 책정해야 돌아가는 우리 집 가계. 심지어 내 용돈은 포함 아님. 그런데 이 안에서 모든 걸 가능하게 하라고.


하. 너무 화가 났다. 지출 내역들을 제대로 보고 고민해 보자고는 것도 아니고 그 안에서 맞춰 써야 되지 않느냐고 어떻게 바로 말할 수 있지? 입장이 바뀌어봐야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치사하고 드러워서라도 빨리 돈을 벌고 싶어졌다. 나는 맨날 펑펑 돈만 쓰는 똥멍충인줄아나.


아침에 눈 뜨자마자 몇 달 동안의 가계부 통계 내역을 보내고 우리가 매월 지출되는 비용들을 다 보냈다. 이젠 남편이 머리를 굴릴 차례다. 나는 당분간 산에 들어가 사는 것처럼 쥐 죽은 듯 조용히 살아야 할 것 같다. 이웃들에게 빌붙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마음 한편은 시원하다. 적어도 이젠 화살이 나에게 돌아오진 않겠지. 돈이 잘 모아지면 남편이 잘나서 다행이오, 못 모이면 나를 이해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길 테니까. 어찌 됐든 하반기만 잘 살아남아보자. 내년엔 무조건 취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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