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마음가계부
두 번째 영어스피킹 스터디가 있는 날이었다. 스터디 시작 시간은 10시 30분, 현재 시각 10시 20분, 지도로 확인해 본 예상 걸음 시간 17분. 오 마이갓! 정말 늦었다. 어른 혼자 기다리게 하는 게 예의가 아닌 것을 알기에 택시를 타버릴까 고민하다 오늘의 소비 일기에 택시비 지출을 쓰는 게 너무 아까울 것 같았다. 10시 20분이 되도록 급한 일이 있었더라면 마음 편안히 택시를 이용했을 텐데 그게 아니었다. 얼른 집청소를 마치고 스터디를 다녀오고 싶은, 돌아오면 개운하게 내 시간을 갖고 싶어 청소기를 돌렸던 나의 욕심 때문이었다.
그럼 차를 운전해 갈까 생각하다 이것 또한 용납이 되지 않았다. 나를 걷고 뛰는데 동기부여가 되도록 이끌어주신 리더분께 틈새 시간을 잘 공략하며 운동하고 있다고 보여드리고 싶었기에, 그렇게 나의 바닥난 체력을 키우고 싶었기에 망설여졌다.
두 마리 토끼를 두고 고민하던 나는 결국 뛰었다. 책가방 속으로 보온병을 집어넣고 한 손에는 휴대폰, 한 손에는 에어팟 케이스를 쥔 채로 뛰기 시작했다. 산들거리는 가을바람이 아닌 무시무시한 제주의 억샌 바람이었지만 그 바람을 가르며 뛰다 걷다를 반복했다. 나는 원래 걷고 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2015년 12월 무릎수술을 받은 후, 초등학생 때 800M 육상선수로 잠시 활동했던 이력과 대학교를 졸업하고 걸은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은 그저 과거의 추억이자 훈장으로밖에 남지 않았었다. 조금만 무리해도 무릎이 아파와 다시 뛰는 것은 생각도 못했고, 한라산 정상에 새로이 오를 수 있을까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아쉬움이 다시 나에게 희망과 설렘으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다행히 10시 31분, 헉헉대며 스터디 장소에 도착했다. 오히려 나를 반갑게 맞아주신 스터디원에게 죄송하고 감사했다. (다음 수업 때는 꼭 10분 전에 도착하리라!)
즐겁게 이야기 꽃을 피우고 나니 배가 너무 고팠다. 스터디하는 곳이 친한 언니가 근무하는 센터였는데 마침 나오는 길 언니가 휴게실에서 떡볶이와 김밥을 펼쳐놓고 있었던 것! 시간 있으면 먹고 가라는 언니의 말을 덥석 물고 음식들 가까이에 앉았다. 언니 말고 오랜만에 뵙는 분도 계시고, 중간중간 반가운 분들이 더 들어오셨다. 오늘의 이 점심 모임이 어떻게 결성된 지는 모르겠으나 집에 가면 맨밥에 김에 김치에 점심을 해결하려던 나에게는 최고의 오찬이었다.
맛있게 점심을 먹고 집으로 가는 길에 에어팟을 두고 온 것을 알았다. 평소 같았으면 내가 받은 혜택에 뭐라도 보답할 거를 사고 갈 나였다. 그렇지만 오늘은 참았다. 아니, 요즘은 받기만 하는 중이다. 내가 받은 것을 꼭 갚아야만 사랑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생각하며 철판을 깔고 비빌 언덕이 있음에 감사하기로 했다. 그 대신 더욱 환한 미소로 한번 더 살갑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나왔다.
아까는 그렇게 나를 내동댕이 칠 것 같던 가을바람이 이번엔 내 등을 떠밀어주었다. 집으로 가는 길의 경사진 동산도 거뜬히 올랐다. 건강한 두 다리와 소울메이트 언니 덕분에 소비도 줄였지만 내 마음 통장에 뿌듯함과 사랑이 플러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