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어린 시절, 나에게 제사는 오랜만에 사촌들을 만나 즐겁게 놀 수 있는 날이었다. 누구의 기일인가를 생각하기보다 내가 좋아하는 사촌 언니와 오빠들이 올지, 그들과 뭐 하면서 놀 것인지를 더 기대하며 제삿집을 향했던 것 같다. 제사가 모여 있던 겨울은 자주 사촌들을 만날 수 있어 기다려지는 계절이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우리 집에도 제사가 생겼다. 유교문화가 강하게 자리 잡은 친가 식구들은 ‘삭제’라는 이름으로 매월 음력 초하루가 되면 새벽부터 모였다. 왜 한 달에 한 번 제를 지내는지 물으면 그냥 이렇게 해왔기 때문에 해오는 것일 뿐 제대로 된 이유를 들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1년이 되는 날에야 1주기 제사를 지내며 삭제는 끝이 났다.
매년 제사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예민해지는 엄마를 볼 때마다 저렇게까지 짜증을 내야 하나 싶었지만, 남편과 결혼하고 처음으로 시어머니 제사를 모시면서 엄마를 100% 이해하게 되었다. 제사가 스트레스로 시작하고 끝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사를 지내기 며칠 전부터 집주인은 구석구석 집 청소를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수저, 그릇, 소쿠리 등 온갖 식기류가 다 나왔다 들어가야 했다. 제사 음식뿐만 아니라 음식 하러 와주시는 어른들 점심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이 집은 수압이 좋네 안 좋네, 좋은 방석을 꺼내 드려도 방석이 이런 거 말고는 없냐는 등 어른들의 비위까지 맞춰야 하는 것은 참 피곤한 일이었다.
큰할머니 제사를 모시던 샛아빠, 샛엄마(제주에서는 둘째를 ‘샛’이라 표현한다)가 몸이 안 좋아지면서 올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큰할머니 세분을 합제 하기로 결정이 났다. 그런데 그 몫이 막내아들인 아빠에게로 떨어진 것이다. 큰아빠는 돌아가셨지만 장손인 사촌오빠가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있었고, 아빠 바로 위에 말젯아빠가 계셨지만 연세가 있어 그러셨을까 참 알 수 없는 판단이었다. 아무 목소리도 내지 않는, 내지 못하는 아빠를 바라보며 엄마는 억울한 감정만 올라왔을 거다. 다른 집은 다 안 하면서 왜 우리 집만 해야 하는 것인지 말이다.
그 제사를 엊그제 지냈다. 그러나 집주인인 엄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7시에 파제하고 음복으로 식사하기로 해놓곤 밤이 더 어두워져야 조상님들이 와서 음식을 먹고 간다는 어른들의 논리에 30분이 늦춰졌다. 모두 배가 고팠지만, 약속된 시간에 하자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음식을 많이 하면 많다고 “무사 영 하영 해시냐(왜 이렇게 많이 했니)”, 적게 하면 또 적다고 “무사 영 쪽게 촐려시(왜 이렇게 적게 준비했니)” 하는 주변 소리가 불편했다. 얼마나 준비하든 그냥 음식을 만드는 대로 성의를 봐서 '잘했다'고 해주면 얼마나 좋았을까. 거기다 쓰리콤보로, 80대 시누이가 60대 올케인 엄마에게 아직 젊으니 나가서 열심히 돈 벌라는 소리까지 하신 것이다. 안 그래도 생활비도 안 주고 나가 사는 남편이 미운데다 그의 부모님 제사까지 모셔야 하는 게 억울했던 엄마가 결국 한마디 하셨다.
"나는 이렇게 살고 싶어서 사는 줄 아셤수과(아십니까)."
엄마도 설움이 복받치셨는지 울컥하시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친척들이 다 돌아가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집 정리를 하시는 엄마가 참 안쓰러웠다. 평소에 남편이 아내에게 잘하고, 휴가를 받으며 제사를 도와도 본전인 게 시댁 제사인데. 남편의 부모님과 형님, 누이들까지 모셔야 하는 엄마가 안타깝게 보였다. 이런 나를 '요즘 것들은' 하며 혀를 차는 어른들이 계시겠지만 제사의 본질을 찾고 시대에 맞게 변화되었으면 좋겠다. 기일에 자손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모여 조상님을 더욱 가까이 생각할 수 있도록, 나의 뿌리의 역사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