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놀러 갈 곳들을 검색하다 한 블로그 글을 보게 되었다. 처음 글을 읽었을 땐 함께 올린 사진들만 눈에 들어왔다. 만개한 단풍나무들이 오롯이 담겨있는 사진들은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그런데 그때, 제목 옆에 작게 쓰인 한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2008년' 순간 '훅' 하고 지난 세월이 느껴진 것만 같았다. 마음 한 구석이 덜컥하고 내려앉았다. 그렇게 다시 사진들을 들여다보았다. 10년도 더 지난 시간이 무색할 만큼 사진 속 풍경들은 지금처럼 생생했다. '당시에도 꽤나 사진기술이 좋았던 모양이다.' 싶으면서도 문뜩문뜩 서글픈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스크롤을 내리며 종종 모니터에 비치는 내 얼굴이 사뭇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낯선 얼굴 위로 2008년의 내가 함께 비쳐 보였다. 고2, 문·이과의 갈림길에 섰던 나. 특별한 꿈은 없었지만 하고 싶은 일은 많았던 시절이었다. 글도 쓰고 싶고 우주의 비밀도 풀고 싶고 그리고 때론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해보고 싶었다. 보다 솔직하자면 그냥 공부만 아니라면 뭐든 좋았다고나 할까? 그땐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나 '야자'(야간 자율학습)를 해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 공부대신 허락된 유일한 오락은 독서였다. 공부는 싫고 그렇다고 서슬 퍼런 선생님의 몽둥이를 피할 자신은 없었으니 책으로 손이 간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 책, 저 책을 오가며 글도 우주도 그리고 우리네 인생이라는 넋두리도 어느 순간 팔자 좋게 늘어놨던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팔자 좋던 내게도 마음 한구석 걸리는 게 있었다. 바로 타고난 '게으름'. 갈길은 구만리인데 이제나 저제나 출발은커녕 제자리에서 게으름만 피울 줄 알았던 나였다. 그땐 그런 게으름의 이유를 여유라고 포장했지만 지금 와 돌이켜보면 그저 자신이 없었을 뿐이었던 것 같다. 무언갈 제대로 해낼 자신 말이다. 그저 하고 싶다는 치기 어린 이유와 섣부른 각오들로 도전하기엔 세상이 물렁하지 않다는 것쯤은 알만한 나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때의 난, 한 번도 나이 먹고 싶다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나이 들며 책임져야 할 일들은 빤히 보이는데 세상에 쉬운 일들은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15년이 흘렀다. 사람 어디 안 간다고 여전히 게으르고 때론 때와 맞지 않은 여유를 부리는 나다. 그런데 인과응보라 했던가. 종종 어린 시절부터 부려온 게으름의 값들을 톡톡히 치르곤 한다. 마치 떼인 돈 받으러 온 빚쟁이처럼 가차 없는 상황들에 당혹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심지어 나이를 먹고 보니 거기엔 만만치 않은 이자도 붙어 있었다. 귀찮다는 이유로 때론 바쁘다는 핑계로 놓았던 사소한 일들까지 더는 봐주지 않겠다는 심산인지 순번을 기다리듯 번갈아 찾아왔다. 마음 같아선 정말 피하고 싶은데 어른이 된 지금, 어쩐지 더는 피할 곳이 없다.
그리고 그런 빚들 중 사사건건 나의 발목을 잡는 빚 하나. 바로 집안일. 어릴 땐 집안일쯤은 어련히 크면 쉽게 할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손쉽게 부모님 어깨너머로 배울 수 있던 기회들을 나는 훌렁훌렁 넘겨버렸다. 그런데 결혼해보니 웬걸,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 써 배워야 할 일들이 참 많았다. 그리고 이전에 한 번이라도 미리 연습해보았다면 하지 않았을 실수들이 신혼 초 나의 목을 졸라오곤 했다. 그때마다 그간 게을렀던 나를 잠시 원망도 해보았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해결되진 않으니 고스란히 감당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집안일은 나와 부인만 아는 일이라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뭐든 때가 있다’는 옛 어른들의 말에 좀 더 귀를 기울였어야만 했다. 때론 이런 게으름으로 놓친 ‘때’가 더 나이 먹은 나를 조여올까 무섭기도 하다. ’나이 먹고 이것도 못하냐는 말‘ 상상만으로도 부끄럽지 않은가. 스스로 당당하다면야 문제 될 것 없겠지만 나부터 떳떳하자기엔 지난 게으름의 역사가 길었다. 그렇다고 과거처럼 여유로 포장하자니 가능성이라는 포장끈도 얼마 남지 않은 나이가 되어 버렸다. 이제는 정말 뭐라도 해야만 하는 나이가 되었다는 게 2008년의 단풍잎들을 보며 실감이 났다. 그렇다고 지금부터 당장 치열하게 살자? 아니, 사람 쉽게 바뀌지 않는 건 지난 과거가 여실히 증명해 왔다. 그러던 와중 눈에 들어온 책 한 권. 바로, 데일 카네기의 '자기 관리론'이었다. 나는 홀린 듯 그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우연히 펼쳐든 페이지에서 이내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오늘 하루를 충실하자'라는 목차의 단 한 줄. 그 한 줄이 나를 깨웠다. 그간의 나의 게으름의 핑계들이 무색할 만큼 간단한 처방이었다. 그저 그날 하루만이면 되었다. 작심삼일 할 필요조차 없는 단순한 방법. 조급함과 과욕으로 포기해버렸던 많은 일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땐 한 번에 두, 세 걸음씩 나아가고 싶은 마음에 결국 한 걸음도 채 떼지 못했었다. 그리고는 할 수 있지만 안 하는 것뿐이라며 스스로를 속이고 위로했었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알면서도 실천하기 어려웠던 그 말이 이제야 마음에 와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