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 스키폴(Schiphol) 공항에 내려 기차를 타고 중앙역에 도착했다.
엄청난 인파를 뚫고 역을 빠져나오자 거리는 곧장 담 광장(Dam Square)으로 이어졌다.
여름철의 암스테르담 담락(Damrak) 거리는 그야말로 세계 각지에서 온 다양한 여행객들로 넘쳐나는 활기찬 공간이었다.
아름답고 정교한 암스테르담 중앙역과 주변의 오래된 건물들은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도시 풍경을 선사했다. "와! 이게 유럽이구나!"
2002년 7월 처음 밟은 유럽 대륙의 첫 도시 암스테르담의 첫인상이었다!
네덜란드는 국토의 25%가 해수면보다 낮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전국 곳곳에 둑을 쌓고 수로를 만들었다. 암스테르담 역시 12세기경 암스텔 강 하구에 둑을 쌓아 도시를 건설하였는데, 암스테르담이라는 지명이 여기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나아가 네덜란드는 불리한 국토 환경에서 벗어나 일찍이 드넓은 해양으로 눈을 돌려 17세기에 이르면 스페인과 포르투갈 못지않은 해양 강국으로 자리 잡았다. 소위 네덜란드 황금시대(the Dutch Golden Age)로 불리는 시기이다. 1602년 네덜란드 상인들이 설립한 동인도회사는 세계 최초의 다국적 기업이자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로 동서양 무역권을 장악하였다. 이 시기에 네덜란드는 국제 경제와 금융, 무역의 중심지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그 발전의 중심에 위치한 수도 암스테르담은 16세기 이후 국제 무역항으로 자리 잡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럽 굴지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현재 주식거래 시장의 기반이 되었으며,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다음 백과 참조). 오늘날 암스테르담은 네덜란드 최대의 도시이자 경제, 문화, 산업, 교통의 중심 도시로 성장하였다.
암스테르담에 대한 인상을 보다 강렬하게 만드는 요소는 마치 실핏줄처럼 도시 전체를 촘촘히 흐르는 165개, 총길이 75km의 운하들이다.
이 운하들은 도시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처음 건설되었으나, 대략 1588년부터 1672년 사이에 점차 상품을 실어 나르는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함으로써 앞서 언급한 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기를 가져왔다. 암스테르담의 운하는 201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도심은 그리 크지 않아 걸어 다니며 즐기기에 충분한 도시였다. 무엇보다 자전거 도로가 잘 되어 있고 도시 중심으로 파란색 트램이 달리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운하 주변은 4-5층 높이의 집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었다. 건물의 색도 다양해 운하와 더불어 암스테르담의 독특한 도시 풍광을 만들었다.
암스테르담에서 볼 수 있는 폭이 좁고 길쭉한 건물 형태는 17세기 이후 암스테르담 시가 도로나 운하에 면한 건물의 높이와 폭, 창문 개수에 따라 세금을 매긴 데서 만들어진 결과라고 한다. 당시 우후죽순 격으로 건물이 난립하자 폭 8미터 이상이거나 5층 이상, 또는 한 층에 3개 이상의 창이 있는 집들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자 이를 피하기 위해 오늘날 보듯이 폭이 좁고 낮은 건물들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문득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이 그의 저서 『여행의 기술』(The Art of Travel)에서 암스테르담의 건물에 대해 썼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내가 그 아파트 건물을 사랑하게 된 것은 그 건물이 수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건물은 편안하긴 했지만 웅장하진 않았다. 그 건물은 이곳이 경제적 중용에 매력을 느끼는 사회임을 암시했다. 그리고 그 설계에는 솔직함이 있었다. 런던의 현관은 고전시대 신전의 모습을 흉내 내는 경향이 있는 반면, 암스테르담의 현관은 자신의 지위를 인정하고, 기둥과 석고를 피하여 단정하고 장식 없는 벽돌을 택했다. 건물은 가장 좋은 의미에서 현대적이었으며, 질서와 청결과 빛을 옹호했다." (p. 101, 청미래, 2016)
암스테르담에서 흔히 보는 건물들은 독특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런던이나 파리 등 유럽의 대도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식성이 높은 건물들과는 차이가 난다. 그래서 어쩌면 암스테르담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더 편안하다는 느낌이 들 수 있다.
암스테르담의 흥미로운 한 요소는 시내에 오래된 홍등가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드 발렌(De Wallen·네덜란드어로 '홍등가'라는 뜻)'이라고 불리는 이 지역은 14세기에 처음 생긴 이후 점점 늘어나 오늘날에는 300여 개의 성매매 업소와 대마초 카페가 밀집해 있다. 특히 지난 2000년 네덜란드 정부가 성매매업을 합법화한 뒤,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문을 닫은 업소들도 있고 또 암스테르담 외곽으로의 이전설까지 돌고 있으나, 여전히 밤이 되면 붉은색 창문 너머로 여인들이 지나가는 남성들을 유혹하는 장소이다.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는 단연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이다. 그리고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암스테르담의 '국립미술관'(the Rijksmuseum)을 방문해야 한다. 1885년 개관한 이곳은 17세기 네덜란드의 회화뿐만 아니라 시대별 회화, 조각, 공예품 백만 점 이상을 소장하고 있다. 이중 대략 8,000 여점 정도를 전시한다.
1606년 7월 15일 암스테르담 인근의 레이던(Leiden)에서 방앗간집의 아홉 번째 아이로 태어난 렘브란트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즐겨 그렸다고 한다. 대학에 진학하였으나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개인 화실을 열어 그림을 그리다 1632년 암스테르담으로 거처를 옮겼다.
같은 해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의 외과의사조합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제작해 명성을 얻었다. 어두운 방 안에 밝게 빛나는 시신이 아래쪽에 배치되어 있고 위쪽으로 해부학 강의를 하고 있는 니콜라스 튈프 박사(Nicolaes Tulp, 1593-1674)와 그의 강의를 열심히 경청하고 있는 7명의 남성들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 관람객들의 눈길을 가장 사로잡는 작품은 단연 렘브란트의 <야경>(Night Watch, 1642) 혹은 <프란스 반닝 코크와 빌럼 반 루이텐부르크의 민병대>로 불리는 그림이다. 363 X 437 cm의 크기인 이 작품은 네덜란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이 작품을 의뢰한 측은 당시 네덜란드 공화국 시기 암스테르담에서 활약하던 한 민병대였다. 이 그림 역시 밝음과 어둠의 배치라는 새로운 기법으로 탄생하였다. 하지만 당시에 유행하던 대부분의 단체화가 구성원들을 일괄적으로 화면에 배치하던 것과는 달리, 렘브란트의 그림 속 민병대원들은 중앙의 대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화면 뒤쪽으로 밀려나 있어서 그림에 대한 평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함께 활동하였던 프란스 할스(Frans Hals, 1580-1666)가 그린 단체 초상화들도 전시되어 있어 함께 비교해 보면 그림 기법의 차이를 알 수 있다.
1637년에 제작되었다는 할스의 그림 속에서 각각의 민병대원들은 거의 동일한 비율로 화면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들의 동작은 정지되어 있다. 렘브란트는 당시에 유행하던 단체화의 방식을 따르는 대신 자신만의 기법으로 명암 처리를 하고 또 인물 배치와 움직임 역시 훨씬 더 역동적인 느낌이 나도록 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렘브란트에게 그림을 의뢰한 민병대원들의 불만이 제기되었고, 한동안 그림 주문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1650년대 이후 렘브란트는 경제난을 겪었으며, 아내의 죽음까지 겹쳐 힘든 시기를 보냈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렘브란트의 단체 초상화 가운데 또 유명한 작품은 바로 <암스테르담 직물 제조 업자 길드 이사들의 초상화>(1662)이다. 1년 만에 완성한 이 초상화 속 인물들은 화면 속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의 방문에 몸을 일으켜 반응하는 동적인 순간을 보여준다.
이처럼 한 단체에 소속된 사람들을 그리는 '그룹 초상화'는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의 고유한 장르에 속한다. 특히 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기 시절 국제금융이나 해외 무역 등으로 부를 쌓은 상인 계층들은 개인적인 용도로 초상화를 주문하거나 나아가 같은 단체의 인물들이 함께 등장하는 초상화를 그리고 싶어 했다. 이는 동일한 시기 프랑스나 영국의 초상화가 주로 왕족이나 귀족들을 대상으로 하던 것과는 차이가 나는 점이다.
렘브란트는 자신의 초상화를 자주 그린 화가이기도 하다.
그는 20대 초반부터 죽을 때까지 거의 40여 년 동안 80 여점 이상의 자화상을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초상화는 세계 각국의 유수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는 그의 자화상 가운데 젊은 시절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이 있다.
대략 1628년 22세 경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자화상에서 그는 이미 이후 자신이 시도하게 될 밝음과 어둠의 대비를 실험하고 있다.
그는 사실주의적 화법을 추구하는 점에 있어서는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나 프란스 할스 등 당대의 다른 네덜란드 화가들과 비슷한 길을 걸었으나, 그 표현 방식에 있어서는 빛과 어둠, 색채의 대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근대적 명암의 시조'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출처: 위키피디아).
이후에도 그는 다양한 시기에 다양한 형식의 자화상을 시도한 바 있다.
렘브란트는 자화상을 그릴 때 기독교적 의미가 결합된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렘브란트가 1661년 그의 나이 55세에 그린 자화상은 '사도 바울의 모습으로 그린 자화상'(Self-portrait as the Apostle Paul)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나아가 렘브란트는 종교화에서도 많은 걸작을 남겼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보았던 그의 그림 <돌아온 탕자>가 다시 떠오른다. 정확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 그림은 아마도 렘브란트가 죽기 2-3년 전에 그린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를 모티브로 한 그의 그림 앞에서 수많은 관람객들이 조용히 그리고 숙연하게 감상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의 생애 마지막 해에 그린 미완성작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시므온> 역시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내용을 소재로 한다. 예루살렘에 사는 시므온이라는 노인이 성모 마리아가 안고 있는 아기가 구세주임을 확신하며 벅찬 감동에 빠진 모습을 그린 이 작품 역시 <돌아온 탕자> 못지않은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이 작품은 스웨덴 스톡홀름의 국립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렘브란트의 생애를 살펴보면 한편으로는 훌륭한 화가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아내의 죽음 이후 여러 번의 여성 편력, 심한 낭비벽과 충동구매 등 그리 바람직하지 못한 인생을 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663년 두 번째 아내도 세상을 떠나고 아들 역시 1668년 전염병으로 일찍 사망하자 그의 외로움은 훨씬 더 깊어졌을 것이다. 그 역시 1년 뒤인 1669년 전염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렘브란트, 그는 탁월한 천재 화가였다!
젊은 시절부터 밝음과 어두움을 적절히 배치해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던 그의 그림은 동시대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 확연히 구분된다.
나아가 그의 그림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점점 더 깊어졌다.
그의 말기작에서 그의 영혼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