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루카 Jun 21. 2024

현대인의 불행이 '비교' 때문이라는 어떤 강연

유명 인강 강사가 대중 강연회에 나와서 우울사회를 진단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과거 그 어떤 시대보다도 풍요가 넘치는 세상에 살고 있음에도 불행한 이유는 (특히 SNS를 통한) 남들과의 비교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아마 이 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결론이 조금 이상하다. 남들과의 비교를 관두면 행복해질 수 있으니 여러분도 지금부터 비교를 관두라는 것이다.


당장 해당 강사는 평소 시험에 합격해서 행복해지라는 말을 많이 해 왔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과목은 상대평가로 채점되는, 즉 비교가 있어야 합격자가 가려지는 과목이다. 그럼 탈락자는 자기가 비교를 하기 싫어도 출제기관의 비교 때문에 불행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그리고 시험에 재도전해서 붙으려면 정답과 내 오답을 비교하고, 합격자와 나의 공부 비결을 비교하면서 개선점을 찾아야 하는데, 이러면 비교가 오히려 행복에 이르는 수단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진정 비교가 불행을 야기한다면, 상대평가가 만악의 근원이어서 폐지되어야 할 텐데, 그 폐해에 불구하고 존속되는 이유는 이를 상쇄할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변별력'이다. 고득점자를 엑셀에 정리하면 인재를 쉽고, 빠르고, 저렴하게 변별해낼 수 있다. 이의 잔인성을 부정할 수 없겠지만, 인재를 채용하는 조직을 개인의 관점에 대입하자면 합리적이기도 하다. 우리 개인 또한 옷을 고를 때, 스케쥴을 고를 때, 먹을 것을 고를 때, 막 고르지 않고 대상을 분별하여 합리적으로 선택한다.


그럼 '분별'이란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내가 봤을 때는 '인식'과 비슷한 단어인데 거기에 비교라는 측면이 강조된 것 같다. 아마 서양의 인식론 철학자들이 했던 말 같은데, 우리는 오성을 통해 사물을 받아들이고, 이들 사이의 비교에서 출발하여 이성을 전개한다. 즉 우리는 숨쉬듯이 비교한다. 잠에서 깨어 눈을 뜰 때부터 비교를 저절로 시작한다. 가령 침대에서 일어나 어두운 하늘을 쳐다보는 그 찰나의 순간에 내가 평소 알고 있는 아침 하늘의 이미지와 비교하고는 새벽에 깨 버렸다고 인식하는 식이다.


그 숨쉬듯이 하는 비교의 범위가 남들에게로 확장하면, 남들과의 비교가 되는 것이고, 우리가 사회적 동물인 이상 이를 피하기는 불가능하다. 아니나 다를까, 남들과 비교해서 불행한 것은 비단 요즘 젊은이들만의 현상이 아니다. 사촌이 땅 사서 배 아프다는 속담이 존재한다는 것부터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다는 점을 증명한다.


강사의 말에 오류를 찾자면 우리는 과거에 비해 풍요로움에 '불구하고'가 아니라 풍요롭기 '때문에' 남들과의 비교로 불행한 것이다. 물질적 풍요에는 여가시간의 풍요, 정보의 풍요, SNS의 발명이 뒤따랐다. 많은 이들이 물질적 여유를 바탕으로 휴식 시간 동안 행복해지기 위해, 또는 행복호르몬 중 하나인 도파민을 분비시키기 위해 정보의 흡수를 누리기로 선택했고, 그래서 SNS를 켰다가 사촌의 부동산 계약 소식에 노출되기가 더 쉬워졌으며, 결과적으로 불행해지는 역효과에도 노출되기 쉬워졌다. 학원가에서 큰 인기를 얻을 정도로 명석한 분이라면, 그것도 역사를 가르치는 분이라면, 사회 변화에 자연스레 따라오는 명과 암의 공존에 대해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요즘 현실에 적용하여 젊은이들의 비교 중독을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가르치기는커녕 타도 대상으로 외치는 것을 보면, 카리스마 있는 일침꾼 이미지를 구축하고 싶어서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


비교로 물든 오늘날의 성질에 대한 그 강사의 일침이 정곡을 찌른 것이든 헛다리 짚은 것이든, 그걸 듣고 비교를 중단하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것 아니겠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겠지만, 나는 이에 대해서도 회의감이 든다. 이는 비교가 본성에 장착되어 있고, 사회를 떠나서 살 수 없는 인간더러 눈 감고 숨어버리라고 처방하는 것과 같다. 이래서는 해결할 수 있는 게 얼마 없다. 비교로 내 처지가 남들보다 못한 게 보인다면, 이를 깔끔히 인정하고서 성장을 위한 동기로 삼으라는 게 차라리 더욱 현실적이고 바람직한 조언이다.


물론 애초에 비교를 통한 성장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었다면, 우울증 환자들이 사회적인 우려를 낳을 수준으로 늘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전부 비교를 끊지 못해서 그렇다"고 퉁쳐서 잔소리한다면 마음은 당장 시원하겠지만, 가뜩이나 나쁜 선택을 할 위험이 많은 상대에게 기름을 붓는 꼴이 될 수 있다. 지켜보는 입장에서 답답하더라도 사람을 살려 놓고는 봐야 하니, 원인과 해결법을 조금 더 심도 있게 파악할 필요가 생긴다.


나는 비교가 만악의 근원이 아닌 것을 넘어서, 오히려 사회 개선을 위해 쓰이는 경우도 많다고 생각한다. 그 중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고발이다. 우리는 정당한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을 볼 때 어찌어찌 참을 수 있어도, 편법으로 부당한 이득을 누리는 사람을 보면 참을 수 없기에 고발로 제동을 걸게 될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비교 기능을 꺼 버리면 얌체 같은 인간들이 활개를 칠 것이고, 이들은 사회의 혹처럼 쌓여서 자정작용을 가로막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매우 복잡하기에 한 가지 원인만으로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게 무엇 하나 없다. 누군가가 "XX의 이유는 다 필요 없고 전부 YY 때문에 그렇다"는 싹쓸이식 주장을 할 때, 타당한 이성보다 편향된 감정이 섞여 있을 것으로 의심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강연회가 싹쓸이식 주장을 위한 매개체로 기능한다면, 진실보다 엔터테인먼트로 치우쳐진 강연이라고 보는 게 대체로 타당하다. 그러므로 이런 강연이 유익한 경우는 기껏해야 모종의 정신적인 감옥에 갇힌 어떤 사람에게 무작위로 잘 얻어걸려서 탈출의 의지를 자극할 때일 뿐일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당신이 책 몇 권 읽었다고 대단해지는 것은 아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