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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루카 Jul 05. 2024

27만원짜리 수박

아내의 요청에 의해 과일 도매상에 가게 되었다. 수박 재고가 남아 있다는 소식에 차를 타고 비포장 도로를 달렸다.


도착하고 공터에 주차하고 있는 와중에 뚱뚱한 사내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365일, 24시간 동안 인간의 몸 생각밖에 안 하는 나는 그의 관리 안 한 체형에 시선을 빼앗겼다. 나는 그 순간에 후면 주차하고 있다는 생각을 잊고 있었다. 그래서 후미등이 철제 계단과 우지끈 부딪혔다.


다행히 계단은 멀쩡했기에 따로 변상할 것은 없었다. 나는 눈물을 삼키며 깨진 후미등 조각들을 손에 주섬주섬 모아 사장님에게 버려 달라 건네 주었다. 차의 데미지로 슬픈 와중에도 나는 역시나 365일, 24시간 동안 인간의 몸 생각밖에 안 하기에 관리 안 된 사장님의 체형에 시선을 빼앗겼다. 좀 전 주차장에서 마주쳤던 사내보다는 덜 뚱뚱했으며, 양 팔에 이레즈미 문신이 있었다.


서울 강북 수유리 먹자골목에 자주 출몰할 법한 이런 인간이 왜 시골 과일가게에서 일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확실히 10년 전의 나였다면 상대에게 매우 쫄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문신한 인간들이 눈에 밟힐 정도로 많아졌다 보니 후미등 조각을 버려 달라는 부탁도 무덤덤하게 할 수 있었다.


수박 꼭지를 드는데 꼭지가 뚝 빠져 버렸다. 그래서 그 꼭지도 버려 달라 부탁하고 나머지 몸통을 구매했다. 차 트렁크에 싣는데 깨진 후미등이 내 마음을 괴롭혔다. 마음 속으로 ㅅㅂ ㅅㅂ 거리면서 집에 도착했다. 이 기회를 반면교사로 삼아야지, 그래도 사람이 다치거나 기물이 파손되지는 않았잖아 등으로 자기 최면을 걸어 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집에 오자마자 수박을 큐브로 조각조각 썰어서 락앤락에 담았다. 신경이 잔뜩 예민해져 있을 때 둘째가 자기 침 묻힌 숟가락을 식기함에 도로 넣었다. 아이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불필요할 수준으로 화를 냈고, 아이의 불결한 습관을 고치겠다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참고로 둘째는 이제 만으로 3살이다.


며칠 뒤 장인어른이 새 후미등을 구했다며 연락을 주었다.

나는 둘째와 함께 차를 타고 장인어른의 지인이 운영하는 카센터로 이동했다. 부품이 분리되고 새로 끼워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아이를 두 팔에 안고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그 사이에 흰 개가 발을 절뚝거리며 눈 앞을 지나갔다. 그리고 몇 분 뒤 커다란 포획망을 든 119 대원 몇 명하고 경찰 한 명이 내 앞에 와서 개를 못 봤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개가 걸어간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부품을 갈아끼우는데 26만원이 들었다. 속이 쓰라렸지만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리라.


장인어른은 어디서 치맥하시고 오는 길이라 얼굴이 잔뜩 뻘개져서 손자를 반겼다. 평소 무뚝뚝하신 분이라 그런지 손자에게 지어보이는 함박 웃음이 굉장히 낯설었다. 장인어른은 우리를 고기집으로 데려가서 소주 한 병을 또 깠다.


나는 무일푼으로 서울 올라와서 어렵게 내 아내와 처남을 키워 주신 장인어른을 정말 존경하지만, 아쉽게도 마땅히 즐겁게 해 드릴 대화 스킬이 부족했다. 365일, 24시간 동안 인간의 몸 생각밖에 안 하는 나는 장인어른에게 담배를 끊고 몇 달 지내 보니 어떠냐고 여쭤보았다. 아직도 담배 생각이 많이 나지만, 요즘에는 흡연자 10 명 중 8명이 금연하는 게 추세라 본인도 따르는 중이라고 하셨다.


나는 용희(가명)랑 용준(가명)이가 대학교 들어가는 것을 보려면 술도 끊어야 하지 않겠냐고 제안해 보았다. 그러나 장인어른은 술이 그냥 생활화되었기 때문에 줄이는 것을 고민해 볼 수 있어도 끊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다. 손주들이 건강히 크는 것을 보지 못하더라도 그냥 운명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하셨다.


그렇다. 길흉화복이란 게 좀처럼 사람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후미등을 깨뜨린 것은 자책할 만한 일이 아니다. 그냥 운명이 그렇게 정해진 것이다. 어느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내가 주차하는 순간에 비만의 사내가 내 시선을 빼앗은 것도, 마침 내 뒤에 철제 계단이 자리해 있었던 것도, 내 운전실력이 형편 없는 것도, 26만원을 작은 돈처럼 여길 재력이 없는 것도 모두 운명이다.


집에 돌아오는 거리를 내달리는 동안 새로 갈아끼운 후미등에서 1천만촉광(내 상상)에 달하는 붉은 빛을 발했다. 아마 뒤에 따라오던 운전자들은 내가 브레이크 한 번 밟을 때마다 눈이 부셔서 고생 깨나 했을 것이다(내 상상).


"아빠, 저기 비행기 있다."

아이가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빠랑 저 비행기에 이름 붙이기 놀이할까?"

"좋아."

"용준(가명)비행기가 어떨까?"

"그럼 난 아빠비행기~"

우리는 하하하 웃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제 만으로 3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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