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회가 지닌 색깔의 총체를 담은 작품
★★★★★(5점)
제목: 살인의 추억을 추억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속 깊은 곳에 추억이라는 감정을 간직하고 있다. 누군가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꼭 붙잡고 시장을 서성이던 순간을 또 다른 누군가는 첫사랑에게 고백하던 순간을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사람마다 추억의 성격, 종류가 다를 지더라도 추억이 가지는 의미는 모두 엇비슷하게 정의된다. 이미 지나가 붙잡을 수 없지만 다시 붙잡고 싶은 행복한 순간으로 말이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은 단순한 우리의 상념에 큰 이의를 제기한다. 추억은 살인자에게 다시 떠올리고 싶은 행복한 순간으로 남았을지 몰라도 그 반대의 처지에 놓인 피해자에게는 결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비극의 순간으로 남아있다는 사실 그 사실을 깨달으면 추억이라는 단어가 결국 과거의 행복을 상징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당연한 도리로 받아들이게 된다.
1. 소년에게 잡힌 메뚜기
영화는 한 소년이 노랗게 익은 살 볏짚 위에 놓인 메뚜기를 잡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소년은 메뚜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조심조심 살펴보며 잡아낸다. 그리고 붙잡힌 메뚜기는 순간적으로 몸과 다리를 부르르 떨며 소년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이 장면은 공동체가 오랜 시간을 소요해 지켜온 가치를 손쉽게 무너뜨리는 범인의 모습을 메뚜기로 빗대어 표현하여 관객에게 공동체적 관점으로 영화를 바라보게 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메뚜기는 많은 농부와 오랜 시간을 통해 맺어진 결과인 벼를 아무런 기여도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은 채 가져가면서 자신의 식욕을 충당한다. 범죄자도 메뚜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사회 구성원이 수많은 합의와 시간을 소요해 제정된 결과의 산물인 법과 원칙을 무너뜨리면서도 일말의 가책을 느끼지 않은 채 오직 자신의 범죄적 욕망을 충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가 지속된다면 농부들은 농사를 짓지 않을 것이고 사회의 구성원은 아무도 법을 지키지 않아 사회가 와해할 것이다. 따라서 영화는 첫 장면부터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하는 범인을 꼭 잡아야 한다는 의미를 메뚜기의 상징성을 통해서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소년이 메뚜기를 잡은 뒤 논밭에서는 트랙터 끄는 소리가 먼 곳에서부터 들려온다. 농부들은 박두만 형사를 트랙터 뒤에 태우며 그를 사건 현장으로 인도한다. 현장에 도착한 박두만은 두 다리를 쪼그려 앉아 작은 거울 조작으로 하수구 아래를 비추며 피해자의 시체를 살펴본다. 어둡게 형성된 공간에서 피해자의 양 손목은 스타킹으로 꽁꽁 묶여 있고 메뚜기와 벌레들이 피해자의 몸에 여전히 밀접하게 붙어 있는 상태로 놓였다. 우선 이 장면은 한국 사회에서 피해자의 위치를 나타낸다. 사건의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피해자가 저렇게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존재하는 것은 피해자는 늘 사회의 양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존재하는 음지적인 존재로 취급되는 사회적 인식을 보여준다. 여기에 더해 피해자의 몸에 붙은 메뚜기는 여전히 가해자와 피해자가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아직 붙잡히지 않은 범인이 또 다른 연쇄살인을 계획하여 재차 피해자의 몸에 붙어 있겠다는 새로운 범행 예고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2. 왜곡된 이야기
이렇게 박두만은 어둡게 감춰진 한국 사회에 이면과 살인자의 잔혹한 범죄성을 들여다보면서 본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하게 된다. 박두만은 귀지를 파던 애인 설영에게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살인사건 피해자 중 한 명인 이향숙의 사건 당일 백광호라는 인물이 향숙이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는 소식을 누군가 봤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박두만은 확실한 증거도 없이 백광호를 유력한 살인사건 용의자로 추정하고 수사 방향을 펼치게 된다. 그는 백광호를 압박하며 거짓된 물증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운동화를 모래에 살포시 놓고 사진을 찍으며 사진이 당시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물증이라고 광호에게 말하며 범인으로 신문한다. 이후 백광호를 통해 현장검증을 시도하여 완벽한 범인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현장에 갑작스럽게 백광호의 아버지가 나타나 다음과 같이 외치면서 -광호야 너 범인이 아니잖어- 순식간에 상황은 아수라장이 된다. 백광호가 아버지를 향해서 도망가고 형사들은 기자들의 질문에 도망가는 장면이 슬로우 모션(slow motion) 효과로 촬영되었다는 부분은 눈여겨봐야 할 지점이다. 슬로우 모션이란 영상이 느리게 흐르도록 촬영하는 기법인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인식하는 시간의 흐름을 완전히 왜곡시켜서 다르게 인식하는 효과를 가진다. 그리고 이러한 효과, 장면에는 당시 수사 상황이 왜곡된 상태로 느리게 진행되어 사건의 진실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대중의 비판 의식 담겨 있다. 사건의 실체를 파악해야 하는 경찰이 자신의 성공과 승진을 위해서 사건을 조작함으로써 실체적 진실을 찾는 일은 점점 더디게 흘러가는 시간적 상황을 슬로우 모션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3. 감각과 체계의 대립 박두만 vs서태윤
박두만은 그렇다면 왜 사건을 조작했을까? 그는 자신의 감각으로 범인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형사 중 한 명이다. 노트에 살인사건 용의자의 사진을 붙여 놓으며 식사하는 두만을 보고 구희봉 수사반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뭔 사진을 그렇게 들여다보고 있냐? 밥맛 떨어지게- 이에 박두만은 자신의 가치관을 들어내는 말을 건네는데 -얘들 얼굴을 딱 보다 보면은 어느 순간에 감이 딱 와 직감적으로- 두만에게 있어 형사란 자신만의 고유한 시선으로 범인을 체포할 수 있다는 특유의 가치관으로 이어지게 되며 이러한 가치관은 범인에 범행동기를 내부적 요인으로 분석하는 계기가 된다. 새로운 수사반장으로 부임한 신동철은 박두만에게 죽은 두 여자의 공통점 같은 거 없냐고 물어보자, 두만은 뭐 일단 둘 다 미혼이라는 점이라고 대답한다. 이는 범인이 미혼여성을 타겟팅 하는 내부적인 욕망이 있는 문제의 인물이라는 의심이 깔린 대답이다. 이와 정반대의 견해를 가진 인물이 있다면 그 인물이 바로 서태윤 경장이다. 그는 완전히 다른 시선 즉 체계적인 관점으로 범인을 바라본다. 그의 가치관은 수사반장에게 새로운 문서를 제시하며 내뱉는 대사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서류들만 자세히 훑어봐도 알 수 있죠. 서류는 절대 거짓말 안 하거든- 서태윤이 생각하는 형사란 자신만의 고유한 시선으로 범인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닌 객관적으로 입증된 자료를 분석하여 통합적인 시선으로 범인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가치관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가치관은 또다시 범행동기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박두만과 갈라지며 결국 범인에 범행동기를 외부적 요인으로 분석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사건 당일에 모두 비가 왔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서태윤은 범인은 비라는 외부적 환경을 활용하여 범행을 벌이는 계산된 인물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고 있다.
4. 진실은 어둠 속으로
그렇다면 내부적 요인과 외부적 요인 어떤 시선으로 범인을 살펴보는 것이 맞는 것일까? 어쩌면 영화는 이 두 가지 시선 모두를 강렬하게 비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점차 흐를수록 피해자는 늘어나고 범인을 찾는 일은 점점 꼬여가면서 사건의 실체는 점차 미궁 속으로 빠지고 있었다. 백광호가 첫 번째 용의자로 지목된 이후 두 번째 용의자로 숲 속에서 수상한 행위를 한 조병순이 지목되면서 드디어 범인이 잡힌 것처럼 영화는 흘러갔지만 범인에게서 운 좋게 살아남은 피해자의 결정적인 증언인 손이 정말 부드러웠다는 부분과 조병순의 손의 모양새와 일치하지 않게 되면서 서태윤 경장이 그를 (취조실에서) 풀어주게 된다. 이후 새로운 범인으로 비 오는 날 라디오에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를 보내는 박현규를 또다시 용의자로 추정한다. 여기에 더해 국과수에서 피해자의 옷에서 정액이 나왔다는 전화가 들려왔고, 범인의 정액과 박현규의 정액이 일치하는지 파악하기 위해서 증거를 미국으로 보낸다. 그렇게 모두가 범인을 잡았다고 생각하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때 여중생이 범인에게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수사팀은 의지를 잃었고, 범인에 극악무도한 행태의 이성을 잃은 서태윤은 집에서 자고 있던 박현규를 철도 위로 끄집어내며 온갖 폭력과 욕설을 내뱉으며 너가 죽였다고 빨리 말하라고 야기한다. 그때 박두만 형사가 미국에서 날아온 문서를 들고 다가가자, 서태윤은 드디어 범인을 잡았다는 확신에 가득 찬 표정으로 문서를 읽더니 이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문서를 믿지 않는다. 문서의 내용은 피해자의 정액과 박현규의 정액이 일치하지 않아 박현규를 범인으로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박두만은 박현규의 얼굴을 손으로 움켜쥐면서 정면을 응시하면서 다음과 같은 대사를 내뱉는다. -씨발 모르겠다. 밥은 먹고 다니냐- 결국 박두만마저도 자신만의 방식인 감으로 범인을 잡으려고 했지만, 그마저 실패하면서 박현규를 놓아주게 된다. 그렇게 진실은 터널 너머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면서 우리는 누가 범인인지 알 수 없게 된다.
5. 범인은 왜 사건현장에 다시 돌아오는가?
그렇게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후 우연히 살인사건의 장소를 지나가게 된 박두만은 직원에게 잠깐 차를 세워달라고 요청한다. 오랜만에 사건 현장에 도착한 그는 처음으로 수사를 시작하게 된 그때 그 하수구 구멍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지나가던 한 소녀가 그러한 두만의 모습을 본 뒤 얼마 전에도 어떤 아저씨가 여기서 그 구멍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고 대답한다. 그래서 그 아저씨한테도 왜 보냐고 물어봤는데 여기서 자기가 했던 일이 생각나서 오랜만에 한번 와 봤다고 두만에게 재차 말해준다. 이에 박두만은 간절한 심정으로 그 아저씨 얼굴을 봤냐고 물어본다. 소녀는 그냥 되게 뻔한 얼굴이라며 평범하게 생겼다고 이야기한다. 소년의 말을 들은 박두만은 그동안 자신이 보았던 용의자의 얼굴을 추억하며 아직도 범인을 잡지 못해 마음속 깊숙이 남아있는 미련의 감정으로 카메라 정면을 응시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리게 된다. 범인은 반드시 사건 현장에 되돌아온다는 말이 있다. 이는 범인에게 있어서 사건이란 즐거운 유희와 행복한 감정으로 추억되어 그때의 감정을 다시 떠올리기 위한 행동으로 추정된다. 영화의 엔딩은 범인의 태도에 관해 큰 메시지를 전달한다. 너에게는 사건이 유희와 행복한 추억으로 남았더라도 피해자와 유가족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고통과 불행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너는 알고 있냐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범죄자의 참혹한 이야기를 하나의 흥미 소재로 취급하며 바라보던 사람들에게도 피해자의 고통을 비추어내는 두만의 눈빛으로 반성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우리는 피해자의 고통과 슬픔의 무게에 공감하며 그들에게 초점을 맞춰서 사건을 바라봐야 한다. 진정으로 사건이 기억되는 것은 살인자의 추억이 아닌 피해자의 추억으로부터 기억되는 것이다. 기억하는 것 자체가 범인에 대한 응징의 시작이란 봉준호 감독의 말은 어쩌면 이러한 관점에서 사용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추억은 사람마다 의미가 달라 비슷하게 정의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