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라는 책에서 등장하는 문장이다. 가끔 내 친한 친구들에게 이 문장이 멋있지 않냐고 물어보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반응하는 친구들이 대다수다. 그때마다 나는 이 문장에 새라는 단어 대신 인간이라는 단어를 넣고 읽어보라고 그러면 문장이 이해될 것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인간은 알을 깨고 나온다. 인간은 신을 향해 날아간다.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엄마의 뱃속에서 나와 걸음마를 떼고 모유를 먹으며 자랐다. 하지만 이러한 성장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엄마와의 관계를 끊어내야 하는데 바로 탯줄을 끊어내야 하는 것이다. 만약 탯줄을 끊어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태어날 수 없다. 즉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엄마라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되고 태어났다는 것은 부모와의 관계를 성공적으로 끊어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시작부터 관계의 시작이고 그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첫 번째로 우리가 마주한 삶의 모습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부모와의 관계를 성공적으로 끊어낸 아이는 사회와 관계를 맺으며 자라게 된다. 학교에 입학하여 자기와 같은 나이 때의 친구들을 만나고 다양한 방식으로 수업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마주치게 된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고 해서 아이가 아니라고 해서 사회와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몸이 아파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은 선생님, 친구들 대신 의사, 환자들과 관계를 맺으며 병마와 싸워 나가는 삶을 이어갈 것이고 학교에서 벗어나 어른이 된 존재들도 직장이라는 공간 속에서 상사, 후배, 동기와 같은 직함들을 단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것이다. 이처럼 우리들의 삶은 수많은 관계로 뒤범벅된 모양이고 이는 모두에게나 예외 없이 적용되는 현상일 것이다. 나 역시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상처와 역경들을 겪곤 했다. 이러한 점에서 영화 와일드는 몹시 처절한 우리들의 모습을 정확하게 포착해 작은 스크린 속으로 옮겨낸 훌륭한 작품이다. 주인공 셰릴 스트레이드의 이름 스트레이드는. 길을 잃어버렸다는 뜻으로 남편과의 이혼 후 새롭게 지어진 이름이다. 스트레이드라는 이름처럼 그녀는 한순간에 삶의 방향을 잃은 존재가 되었다. 엄마의 죽음, 이혼과 같은 상황들은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힘들고 부정하고 싶은 현실로 다가왔다. 도저히 삶의 무게를 견뎌낼 수 없었던 스트레이드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어내며 홀로 PCT 하이킹을 준비한다. 영화는 이 하이킹 준비 과정을 첫 장면에 그려내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하루 20~30km씩 걸으며 그녀는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이 받은 상처는 무엇인지 되뇌며 힘겨운 발걸음을 이어간다. 그러던 도중 식량이 부족해 트럭 운전사에게 식량을 요청하고, 그렉이라는 같은 PCT 회원을 만나 같이 음식을 먹으며 대화하고, 결정적으로 마지막 카일이라는 아이를 만나면서 자신이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게 된다. 무려 4년 7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한 그녀는 어떻게 단번에 카일이라는 작은 소년의 만남으로 정체성을 찾게 되었을까? 나는 바로 공감을 기반으로 하는 소통이 그녀의 정체성을 찾게 해준 열쇠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들 모두는 각자 어마어마한 세계의 우주를 머릿속에 가지고 있으며 각 개인의 사고와 생각의 깊이는 타인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들은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존중하지 못하는 의사소통을 살면서 무수히 많이 경험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스트레이드라는 인물은 편안한 의사소통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인간관계를 바랐을 것이다.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위로해 주는 유형의 사람들을 그동안 주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유형들을 말이다. 스트레이드의 가까운 친구들도, 하나뿐인 남편도, 주변에서 도대체 왜 이러냐면서 화를 내거나 다그치는 이야기밖에 하지 않았다. 이러한 의사소통은 상호 교류적이라는 개념을 적절히 인지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소통의 방식은 올바른 형식이 아니다. 스트레이드의 이야기와 마음을 이해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의사소통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자기 생각과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행위로만 남으며 스트레이드에게 큰 상처와 고통만을 안겨줄 뿐이다. 그러한 의사소통 방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아픈 부분을 먼저 드러내고 타인의 상처를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카일이라는 아이의 행동과 말들은 그동안 스트레이드가 받은 상처를 치유해 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리고 이는 사람들과 엮이면서 느꼈던 슬픈 감정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는 데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낼 수 있다. 결국 의사소통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타인의 마음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라는 결론을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사람이 받은 상처는 사람에 의해서 치유될 수 있다는 의사소통이 가진 힘도 알 수 있게 된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올바르지 않은 의사소통을 하는 대인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게 된다. 나 역시도 최근에 상처를 입고 관계를 끊은 친구가 있는데 무슨 말을 하면 집중하지도 않고 스마트폰을 보고 있거나 항상 공격적인 말투와 이야기를 하는 친구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 처음 만났고 꽤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였는데. 친구로서 같이 지내는 동안 여러 번 불편한 부분과 지점을 이야기해서 고쳐주길 바랐으니 여전히 같은 문제와 행동을 이어 나가는 것을 보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최근에 연락처와 카카오톡 메신저를 아예 삭제했다. 영화에서도 스트레이드가 폴이라는 남편과 이혼하기 전에 차에서 막 고성을 지르고 욕설하는 장면이 있는데 보면서 그래도 나는 저러한 방식으로 관계를 끊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만약 감정이 쌓여서 사건이 계기가 되어서 영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서로 고성을 지르고 욕설했다면 많은 후회와 깊은 반성을 할 것 같다는 감정도 느꼈다. 지금보다 더 어리고 인간관계에 있어서 미숙할 때 메시지로 못할 말 다 하면서 서로 관계를 끊고는 했고 오랫동안 반성했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고 그냥 조용히 관계의 빈도수를 줄이면서 자연스럽게 관계를 끊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 같아서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으면서 각자 더 좋은 사람과 인간관계를 도모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서 과거보다 관계를 끊는 방식이 더 좋아졌다고 생각된다. 만약 누군가 나를 해코지하거나 괴롭히는 말과 행동을 지속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과감히 손절하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엄마의 따뜻한 품속까지도 과감히 깨부수며 태어난 존재들이다. 그러한 존재들이 사악한 인간들에게 지배당하고 괴롭힘당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는 자들의 관계 속에서 속해 있다면 그들과의 관계를 깨부숴야 한다. 잘못된 인간관계를 깨부수는 일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잘못된 인간관계에 둘러싸였던 내가 더 좋은 사람들을 찾아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더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관계의 축소와 확장을 반복하는 과정이며 이는 세계의 축소와 확장이라는 의미를 연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를 파괴하는 일이며 한마디로 말해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는 일이다. 우리의 삶이 사람을 많이 만나던 사람을 적게 만나던 이 모든 것은 기존의 관계를 깨부수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도 깨부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