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이 기억하는 손
보통 대개는 이런 제목의 글에서는
콩밭 매던 칠갑산 홀어머니 아낙네
물지게 벽돌 지게 어깨가 부서져라 닥치는 대로 일을 하시던 8남매를 먹여 살리시던 아버지
이런 분들이 등장을 해야 순리대로 흘러갈 것 같은데. 왠지. 뭔가 모르지만. 그냥.
하지만 여기서 어머니 아버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내가 이제껏 살면서 잡아본 손 중 가장 거칠고 투박하고 손상이 많이 되어 있던 손은
미국 알래스카 페어뱅크스에 사는 60대.. 아니 50대? 그 정도 연세가 있는 미국 아주머니의 손이었다.
그녀는 우리가 2박 3일 동안 묶었던 B&B(Bed & Breakfast) 주인 여자였다.
10월의 알래스카. 게다가 페어뱅크스. 북쪽 알래스카.
관광객이 이미 8월에 훌쩍 모두 다 떠나버린 알래스카. 낚시꾼들도 8월이면 철수하는 페어뱅크스.
앵커리지에서는 그래도 눈에 덮이지 않은 길이 간간이 보였는데
페어뱅크스로 올라오니 이미 눈이 쌓이고 쌓이고 그 눈이 얼음이 되고 그 위에 또 눈이 와 덮이고를
반복하여 내년 봄이 와야 도로의 속살이 드러날 지경이었다.
철 지난, 지나도 한~참을 지난 이런 곳에 대체 무엇을 위해 여기에 왔는지 모를 수상한 우리 같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앵커리지에서부터 이곳으로 쉬지 않고 달려왔고(5시간)
오늘 길에 혼과 넋과 정신과 영혼이 가출할 만큼의 온갖 일을 다 당한 이후라서 우리에게 문을 열어주고
잠을 재워주는 그 어떤 숙소라도 감사하며 들어가 곧바로 쓰러져 잠을 자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손님이라고는 우리 식구밖에 없는 것 같았다.
방은 따뜻하고 좋았다.
우리가 지냈던 방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숙박료에 포함되어 제공되는 '아침밥'이 너무 훌륭했다.
2박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두 번의 아침밥을 먹었는데
어제와 오늘의 아침밥 메뉴가 완전히 달랐다. 솔직히 이럴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빵은 갓 오븐에서 나온 듯 따뜻했고
커피는 신선했다. 커피 옆 작은 유리컵에 담긴 오렌지 주스는 주인아주머니가 직접 반으로 가른 오랜지를 짜서 담아준 것이었고 스크램블드 에그는 부드러웠다. 이것 이외에 소시지, 감자볶음 등등 뭐가 무척 많았다.
심지어!!!
이 모든 음식들을 아주 예쁜 접시, 은 포크, 은수저와 함께 서빙을 해 주셨다.
(아........ 아주머니. 왜 이렇게까지. 아.......... 부담 부담 부담스러워요)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분명 그랬다.
우리는 그날 아주머니가 정성스럽게 차려준 밥을 얼른 먹고 단단히 꽁꽁 여미고 무장을 하고 나와 하루 종일 페어뱅크스 주변에서 '오로라(Northern Light)'를 찾아 헤매었다.
하지만 오로라는 보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일요일. 2박을 하기로 했으니 짐을 빼야 하는 날이었다.
훌륭한 아침을 먹었다. 두 번째 아침을 대접받으려니 황송하기까지 했다.
낯선 도시, 모르는 도시였지만 교회를 찾아 예배에 참석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주머니께 물어봤다.
교회? 어 그것 참 잘되었군. 나도 지금 교회에 갈 건데 말이야.
짐을 빼서 차에 싣고
그녀의 차를 졸졸 쫓아 그녀가 다닌다는 교회로 갔다. 예배에 참석했다. 예배가 끝났다.
원래대로라면 숙소에서 안녕~ 인사를 하고 헤어졌겠지만
여기까지 따라왔으니 이젠 여기서 안녕~해야만 한다.
안녕히. 고마웠어요. 편안하게 잘 자고 근사한 밥도 잘 먹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때 나는 그녀와 처음으로 손을 잡았다.
거친 손이었다. 솔직히 손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손이었다. 손바닥이 꼭 발바닥 같았다.
아주 굳은살 많고 거칠어진 딱딱한 발바닥 같은 손바닥이었다.
내가 이제껏 살면서 잡아본 남자의 손, 여자의 손, 노인의 손, 그 어떤 손보다도 거칠고 상하고 두껍고 뻣뻣한 손이었다. 아직도 내 손바닥이 그날의 감촉을 기억하고 있다.
다음에 꼭 다시 와요. 춥지 않을 때.
그녀의 손은 왜 그다지도 거칠었을까. 무슨 사연을 가진 손일까 종종 생각나고 궁금하다.
그녀의 말대로 춥지 않은 계절에 다시 가서 우리의 지난 여행을 추억하고 싶지만
거친 손의 그녀가 아직도 거기에 있을지, 만약 그녀가 거기에 없다면 다시 그곳에 가는 일이
의미가 있을지 잘 모르겠다.
만약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때 우리를 재워줘서. 정성껏 우리를 잘 먹여줘서 고마웠다고
다시 한번 꼭 말해주고 싶다. 그녀의 거친 손을 마주 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