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생각을 거의 수십 년째 해 오고 있다.
어릴 적 손에 땀을 쥐고 마음 움찔움찔 하면서 그림 동화로 읽고 그 이후엔 신난다 재미난다 티브이 어린이 명작 동화로 보고 그 다음다음엔 내 아이에게 읽어주고 그렇게 수십 년을 지나는 동안에도 나는 이 생각을 자주 하는 편이다.
솔직히 제일 처음 그림 동화로 이것을 읽었을 때 임금님이 '아, 내가 어리석었어!' 라며 뉘우쳤다는 대목이 마음에 전혀 와닿지 않았다. 정말이다. 고작 다섯 살 여섯 살이었겠지만 이런 결말은 '엥??' 스러운 결말이었다.
꼬마였던 나는 이 동화의 클라이맥스 부분, 바로 소년이 벌거벗은 채 행차하는 임금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와, 임금님이 벌거숭이네! 와하하!"
이렇게 외쳤을 때 나도 모르게 침을 꼴딱 삼켰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 불쌍한 소년. 경찰 아저씨가 잡아갔을 거야.
그런데 동화는 그렇지 않았다. 행차하던 임금님이 자기 자신을 급 부끄러워하면서 아아... 내가 어리석었어... 그러면서 마구 회개와 성찰을 한다.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나겠어? 다섯 살 혹은 여섯 살이었던 꼬꼬마의 짧은 인생 경험으로도 잘 믿기지 않는
결말이었다. 꼬꼬마는 실망했다.
그리고 그 꼬꼬마는 자랐다. 이젠 더더더 시니컬하게 늙어가고 있는 중이다.
수십 년 동안 내 주변 세상을 살펴봤지만 이 동화의 결말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꼴은 보지 못했다. 아직.
벌거벗은 임금님 등장인물 중 가장 나쁜 사람은 누구인가? 이런 문제가 출제되었다고 상상을 해보자.
1. 임금님
2. 투명한 옷을 만든다는 사깃꾼들
3. 중간중간 틈틈이 투명 옷을 칭송한 신하들
4. 소년이 에헤헤 하기 전까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만 껌벅껌벅하던 백성들
5. 해맑고 겁 없는 소년
나는 수십 년간 이렇게도 저렇게도 다 생각해보고 이런 결말 저런 결말 다 내려 보기도 했다.
하지만 1-5번 중 어떤 번호를 골라야 정답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심지어 답은 한 개가 아닐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다가 한 가지만큼은 확실해진 것이 생겼다.
등장인물 모~~ 두 나쁜 사람이라는 답. 즉, 1번부터 5번까지 모두 나쁜 사람이라는 답. 모두의 잘못이 벌거벗은 임금님을 만들어냈다는 괴변스러운 답. 너도 죄인, 나도 죄인, 우리 모두 죄인
이런 답을 내놓는 사람들을 내가 싫어한다는 것이 아주 확실해졌다.
고매한 척하면서 목소리를 촥 깔고 저런 답이 세상에 둘도 없는 현명한 답변인 듯 읊조리는 사람들 속에서
그래, 나만 이상하지. 내가 이상한가 봐 하면서 맞춰보려는 노력까지 했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런 노력을 했었던 과거의 내가 부끄럽다.
벌거벗은 임금님 동화에서 누가 가장 나쁜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지금 이것을 가지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빠진 내가 생산적이지 않은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생산적인 일을 하자. 빨래를 개고 설거지를 하자)
Illustration from goog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