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NYC. 맨해튼.
예전에 나는 왜 사람들이 맨해튼을 맨해튼이라고 부르지 않고 '시티' 혹은 '엔와이씨'라고 부르는지 궁금했었다. 그래서 30년 동안 맨해튼 안에서만 살고 있다는 뉴요커에게 진지하게 질문을 했더니
글쎄, 그냥. 뉴욕이 넓잖아. 넓고 넓은 뉴욕 중에서 꼭 집어 맨해튼을 강조하려다 보니 뒤에 시티를 붙인 걸 거야
라는 미덥잖은 대답을 들었다. 미덥지 않았지만 나도 살다 보니 이젠 맨해튼을 지칭할 때 엔와이씨라고 하는 일이 많아졌다. 남들이 하니까 그렇게 따라 하는 거다. 말이라는 게 다 그렇잖은가.
2020년 4월 이후 나는 맨해튼에 가 본 적이 없다.
맨해튼을 가로지르는 조지 워싱턴 브리지라든가 링턴 터널이라든가 브루클린 브리지, 홀랜드 터널 등은 운전을 하여 지나다녔지만 2020년 4월 이후 나는 내 발로 직접 맨해튼 거리를 걷는 다든지, 지하철을 탄다든지, 버스를 타는 일은 하지 않았다.
코로나 발생 이전의 나는 내가 타야 할 버스의 시간표를 다 외우고, 내가 타야 할 지하철의 노선과 배차 시간을 좔좔 외우며 잦은 연착과 엉망진창으로 꼬인 배차에도 당황하지 않고 수만 명이 강물처럼 흘러가는 지하도를 미꾸라지처럼, 그러나 전력질주를 하여 내가 타야 할 열차와 버스를 놓치지 않던, 그런 사람이었다.
살이 쪄서 뒤뚱거리는 뉴욕 지하철의 'Rat'(거대+우람한 쥐)와 계단에서 눈이 마주쳐도 흠칫! 놀라지도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연일 뉴스에서 보도되는 맨해튼 안에서 일어나는 흉흉한 사건들- 코리안 타운에서 백주대낮에 한국 여자가 괴한에게 구타를 당했다든지, 노인이 공격을 당했다든지, 철도로 밀어 떨어뜨렸다든지, 음식 배달부로 위장한 괴한에게 죽임을 당했다든지, 멀쩡한 커피숍이나 음식점에서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황당한 소리를 듣는다든지, '코로나 병균들!'이라는 소리를 듣는다든지, 등등 등등 등등의 일들 -
나는 이런 뉴스를 보고 들으며 맨해튼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는 나의 처지에 안도했다.
나는 맨해튼이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고 나가보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2022년
6월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발레리나 서희(Hee Seo)의 백조의 호수 공연 스케줄이 열렸다. 나는 서희에게 가장 어울리는 배역은 '지젤'이라고 생각하지만 ABT 2022 시즌에 지젤 공연은 없었다.
서희의 백조의 호수를 보려면 메트로 폴리탄 오페라 하우스로 가야 하고 거기로 가려면 맨해튼 한복판으로 가야 하는데 과연 나는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 거기까지 가야 할지가 문제였다.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갈아타고 지상과 지하를 넘나드는 여정을 공연 시작 전인 이른 저녁에야 혹시 용기를 내어 가능할는지 몰라도 150분의 공연이 끝나고 나면 밤 10시 가까이가 될 텐데 깜깜해진 맨해튼에서 다시 지하철 타고 또 타고 갈아타고 버스 타고................ 아........................ 이것은 불가능한 동선이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방법은 깨끗이 포기했다.
운전을 해서 가기로 하고 공연장과 가까운 주차장을 찾아 예약도 했다.
코로나로 세상이 멈춘 동안 내 사랑 '서희'도 늙고 낡았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나의 우려와는 달리 '서희'는 건재했고 공연은 아름다웠다. ABT 2022 SUMMER
후덥지근한 7월의 늦은 밤. 센트럴 맨해튼. 공연장에서 거리로 나온 관객들이 주변에 흥겨운 기운을 뿌려대고 있었다. 모두들 웃고 있었고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기세를 몰아 이 흥겨움을 더 만끽하려는 청춘들은 근처 pub이나 식당으로 카페로 삼삼 오오 육육 칠칠 무리 지어 걸음을 재촉했고 나와 내 동행은 주차 빌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 앉아 상상만 하던 맨해튼의 밤거리는 무서웠는데 '나와보니 이렇게 좋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물론, 번화가를 조금 벗어나 주차빌딩이 가까워오자 사람도 별로 없고 다시 으스스해졌다.
코로나로 다 같이 동굴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전 세계에 100명이라고 치고 동굴을 슬슬 벗어나는 사람들 순위를 매긴다면 나는 아마도 94등이나 95등 정도 되는 쫄보 겁보이겠지만
맨해튼에 나가 내 두 다리로 서서 세상을 둘러보니
좋든 싫든. 동굴 생활은 이제 접어야 할 때라는 걸 알게 되었다.
동굴에서 짐을 챙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