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하신 오징어 혹은 새우
홈+러스 **지점 내려가는 방향 에스컬레이터였다.
오랜만의 한국 방문에 한껏 들뜬 우리 세 식구가 룰루랄라 동네 마트에 쇼핑을 나갔던 어느 초여름 저녁이었다. 무려 5년 전.
이것도 먹고 싶고 저것도 먹고 싶었던 우리는 쇼핑카트가 평지에 다다르면 전투적으로 쇼핑을 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주변을 살피고 귀도 쫑긋! 귀 기울이고 있었다. 그때 들었다. 익숙한 초특가 깜짝 세일 안내 방송을.
싱싱한 생물 오징어가 지금 딱 10분 동안만 킬로에 만 이천 오백원이시구여
나는 나만 그렇게 들은 줄 알고 내 귀를 의심했는데 앞서 있던 아이와 남편이 뒤를 돌아보며
지금 뭐라고 했는지 들었어? 오징어가 만 이천 오백 원이시래. 오징어를 왜 높여?
5년 전 기억이라 오징어였는지 새우였는지 의견이 둘로 나뉘고 있다. 아무튼 둘 중 하나였다.
그 '만 이천 오백원이시구요' 가 너무 웃겨서 우리는 막 웃었는데 쎄~한 느낌이 들어서 주변을 살펴보니
우리 셋만 빼고 아무도 웃겨하지 않는 모습에 얼른 표정을 바꾸고 다른 가족들을 진정시켰다.
음.. 조용히 해. 우리만 웃긴가 봐.
코로나로 고국 방문이 꽉 막혔던 2년을 보상이라도 하듯 올여름 한국에 다녀온 사람들이 주변에 참 많다.
나는 가지 못했다. 다녀온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이번에 갔더니 새로운 말하는 풍습이 생겼더라고요. 그거 아세요?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고객님 주문하신 그린티 프라푸치노 나오셨습니다아~ 음료수한테 존대를 하더라고요. 나오셨대요. 하하
아이고 그런 게 유행하기 시작한 건 이미 코로나 전부터 그랬고요. 제가 들은 건 이런 거예요.
고객님 주문 확인 한번 다시 하겠습니다. 해피밀 하나 빅맥 세트 하나 맞으실까요? 엉겁결에 네 맞으세요. 이렇게 대답을 했지 뭐예요.
우리가 몇 년 전 겪었던 만 이천 오백원이시구요의 다른 버전들을 체험하고 돌아온 듯 보였다.
물방울이 한 방울 한 방울 스며들면 젖는 줄 잘 깨닫지 못하듯이 만약 나도 계속 살던 곳에서 매일매일 살았으면 이렇게까지 귀에 확 꽂히듯이 그런 말이 들리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번 듣고, 두 번 듣고 처음엔 왜 저렇게 말하나 이상하게 생각하다가도 열 번 백 번 들으면 그것이 처음만큼 이상하지 않게 느껴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물리적으로 떨어진 거리감도 멀지만 가끔씩 내 나라의 말에서 느껴지는 거리감도 상당하다.
아마도 그건 진상 손님들에 대한 방어의 수단으로 시작된 이상한 말투일 거야
국문학을 전공한 친구가 말했다.
사는 게 팍팍하고 짜증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라 있어서 누구 하나 걸리기만 해 봐라 심정으로 살다 보니
가장 만만한 사람에게 - 나의 '갑질'을 참아줄 사람- 진상을 부리는 경우가 10년 전 보다 현저히 많아졌는데 그중 가장 만만한 꼬투리는 '직원이 손님인 나를 무시했다'라든가 '손님에게 예의가 없다' 같은 이유가 대부분이라는 것.
분위기가 이러하니 응대하는 쪽 입장에서는 철두철미하게 불상사에 대비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오징어에도 높임말을 쓰고 거스름돈에도 존댓말을 하고 사람에게도, 물건에게도, 커피에게도 모두 모두 높여 불러 주는
그런 풍습(?)이 생긴 것 같다고.
모양새는 좀 웃긴다 해도 적어도 손님을 무시했느니 무례했느니 하는 불평은 듣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친구의 분석은 꽤 일리가 있는 분석일 것이다. 나는 내가 국내에 없는 동안 놓치고 동떨어진 어떤 시류를 그녀의 설명으로 따라잡고 이해하는 편이다.
그런데 설명을 듣고 의견을 나누고 수다를 떨고 대화를 마치고 나니 서글픔이 밀려왔다.
몇 년 전.
내가 지금 '압존법'을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5초 안에 결정을 해야 하는 다급한 상황에 놓인 적이 있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의 '수준'을 가늠할 수 없었다. 불안했다.
이 분이 만약 압존법에 대해 아는 분이면 내가 사용한 말투에 대해 만족을 할 것일 테지만
만약 압존법이 그분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투라면 나는 당장 '존댓말도 제대로 못하는 천하의 재수 없는 것' 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상대의 수준을 알 수 없어 위태했다.
5초 동안 백 번 망설인 후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그분의 '수준'을 믿고 당당하게 압존법을 사용해서 깔끔한 문장을 내뱉었는데
결과는
'존댓말도 제대로 못하는 천하의 재수 없는 어린것'으로 여태껏 낙인이 찍혔다.
친구의 설명을 그때 미리 들었더라면
오징어에게도 새우에게도 존대하고
전화도 오셨다고 하고
세상 모든 만물들을 높이고 존대하고 받들어 살아가면
나 스스로에게 내가 좀 멍청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존댓말도 제대로 못하는 싸가지로 욕먹는 것 정도는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일러스트- 구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