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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밤 Jun 14. 2024

요즘 누가 옷에 구멍 날 때까지 입나

저요


나는 옷을 입다가 어딘가에 내가 해결하지 못할 만한 구멍이 나면 버린다.


바느질을 하거나 수선을 해서 고쳐 입을만한 가치와 가능성이 있으면 시도해 보지만 그렇지 않다면 과감히 버린다. 

그동안 잘 입었다. 안녕. 이렇게 말하고 진짜 쓰레기통에 버린다. 쓰레기통에 휙 던질 때 약간 희열을 느낀다.

구멍이 났기 때문에 어딘가에 도네이션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된 옷이라 미련 없이 버려야만 한다.

나이라도 젊었다면 옷에 난 구멍도 스타일이라고 박박 우기겠지만 늙어가는 나에게는 추접이다.


집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어느 동네에 내가 정말 좋아하는 중고 가게가 있는데 그 가게는 설립 이념도 좋고-모든 수익은 그 도시 어린이 병원에 기부- 동네 할머니들의 자원봉사로 운영이 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는 그 가게 물건의 질이 너무 좋다는 점이다.

가구, 주방용품, 소형 가전제품, 도자기, 그림, 운동기구, 아기용품, 귀금속, 가방, 구두 등등 여러 섹션들이 구비되어 있을 뿐만이 아니라 때로는 '명품'도 발견할 수 있다. 1940년대에 만든 '구찌' 핸드백이 진열된 걸 본 적이 있다. 

나는 그 가게에서 중고옷과 중고 그릇등을 가끔 구입하는데 거의 몇 십 년씩 된 것들이다.

옷에 붙어있는 상표를 검색해 보면 2차 세계대전 즈음에 맨해튼 패션디스트릭에 있던 어떤 옷가게가 찾아질 때도 있고 수십 년 전에 망한 회사 이름이 나올 때도 있고 심지어 정말 어떤 디자이너의 이름이 나올 때도 있다.

예전 옷들은 요즘 옷들과는 달리 우선 옷감 자체가 너무 좋고 (면, 실크, 캐시미어, 리넨 등등) 바느질이 섬세하고 디자인이 독특해서 좋다. 물론 몇 십 년 전에는 평범한 옷들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는 모든 부분이 독특하게 보인다. 그래서 나는 중고 옷들이 좋다. 육십 년 전에 만들어진 똑같은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를 길거리에서 만날 가망성은 희박할 테니.

60년 먹은 실크 블라우스를 몇 천 원에 사들고 너무 좋아 함박웃음을 짓는. 그게 나다.




지난주에도 빨래를 개다가 반팔 티셔츠 하나와 어중간한 길이의 바지에서 구멍을 발견했다.

입고 더러워진 옷에서 발견된 구멍이 아닌 갓 빨래를 하고 건조까지 끝난 옷에서 발견된 구멍이라 나는 그 옷들을 텃밭일을 할 때 입고 더러워진 상태에서 버려 버렸다. 너무 기분이 좋았다.(나는 변태인가)

썩어가는 지구에게 눈곱만큼 좋은 일을 했다는 자긍심도 느낀다.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지구야.


구멍이 날 정도로 알뜰히 입은 옷들을 버릴 때 느끼는 희열과 지구사랑 자긍심과는 별개로

날로 헐렁헐렁해지는 내 서랍과 옷장 공간들을 보고 있자 하면 가슴이 뛴다.

내가 오래전부터 내 옷장에 가지고 있는 소박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옷걸이와 옷걸이 사이가 어느 고오급 부띠크처럼 할랑할랑 넉넉한 공간이 있어서 옷 하나를 꺼낼 때 다른 옷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우아하게 쏘오옥 그 옷만 꺼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

그 소망을 이루려면 옷장 공간을 넓히거나 옷의 가짓수를 줄여야 하는데 공간을 넓히는 일이 가짓수 줄이는 일보다 훨씬 어렵고 돈이 많이 드는 일이라 나는 가짓수를 줄이는 방법을 택했다.

나는 이 일을 꽤나 잘 해내고 있는 중이다. 아직까지는.




이렇게 하나하나 야금야금 내 옷장에 대한 소망을 차곡차곡 이루다가

어느 날! 그날이 오면! - 할랑할랑한 옷장의 그날- 그날이 오면!

마음에 쏙 들고 질 좋고 비싸고 예쁜 옷을 몇 개만 사서 옷장에 넣고 죽을 때까지 깨끗하고 단정하게 입을 것이다.

어서 내 옷에 구멍들이 빨리 빨리 났으면.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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