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른밤 Feb 18. 2019

홈쇼핑 좀비가 되는 중입니다

이젠 그만 하려구요



큰 인형 열면 그 안에 작은 인형, 그걸 또 열면 더 작은 인형이 끝도 없이 나오는 마트료시카 인형(Matryoshka Doll)처럼 한국으로 오는 가방을 그렇게 챙겼다.

제일 큰 수화물 가방 안에 작은 수화물 가방, 그 안에 기내용 가방을 넣어 공항에서 짐으로 부치고

나는 내 백팩에 헤드폰, 랩탑, 그리고 눈가리개, 여권, 지갑, 일회용 포장 손세정 티슈 10개만 넣었다. 그것만 등에 매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마트료시카'스타일' 내 짐가방 안에는 양말 두 켤레, 속옷 한 벌, 스노우부츠(혹시 한국에 눈이 많이 올 것을 염려. 기우였다), 잘 때 입을 옷, 터틀넥 긴팔 윗도리, 셔츠 한 벌만 넣었다.

얼굴에 바를 화장품도 안 챙겼고 심지어 내가 쓸 칫솔도 가져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국에 도착하는 즉시 내가 필요했던, 원했던, 바랬던, 모든 것을 구입하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왔기 때문이다.

음핫핫핫.




열네 시간 혼돈과 공포의 비행에서 갓 탈출한 나는 한국 도착한 날 밤 의외로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래서 티브이를 켰다. 이때가 아마 밤 12시가 가까운 시간이었을 거다. 수~~ 십 개의 채널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채널 두세 개 건너 하나씩은 홈쇼핑 채널이었는데 나는 처음엔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뻥튀기를 우적 거리며

방송을 보다가 나중에는 자세를 정돈하고 똑바로 앉아서 시청을 하게 되었다.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흥미진진하고

그 어떤 예능보다도 재미있잖아!!!! 저 사람들 먹는 것, 말하는 것 좀 들어보게 세상 사람들아.

적어도 입국 첫날 밤을 맞이한 나에게는 그랬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방송이 있다니!

새벽 4시쯤 화장실을 가려고 거실에 나왔던 식구 중 한 명이 그때까지 홈쇼핑 채널을 보고 있는 나를 보고 '무슨 그런 걸 보고 혼자 낄낄거리고 있냐 잠이나 빨린 자라' 면서 나무랐다.

그래, 바로 여기가 거기구나. 모험과 신비가 가득한 나라 우리가 꿈꾸던 그곳.

내가 필요했던, 원했던, 바랬던, 모든 것을 구입할 수 있는 곳. 여기는 티브이 홈쇼핑~




2주간 동안 매일 밤 홈쇼핑 채널을 열혈 시청하다 보니 이들의 '패턴'도 파악을 하게 되었다.

오전 오후 밤 시간으로 나눠 어떤 시간대에 어떤 상품들이 팔리는지, 소비자의 관심을 어떻게 끌어야 하며 결국 사람들이 '내 전화기 어딨어' 라며 주문으로 가게 만들려면 어떤 방법을 쓰는지 등에 대한 패턴이 보였다.

팔고자 하는 쪽의 속셈이 유리창을 통해 관찰을 하듯 뻔히 보이지만

그 뻔한 속셈에  '어머 저건 사야 해'와 '저건 뻔한 상술이야' 사이에서 흔들리는 나 자신을 보고 혼자 피식! 웃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나를  '전지적 시점'으로 바라보며 분석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분석이고 뭐고 나는 내가 사는 곳에서 앞으로 2-3년 간 사용할, 필요할 물건들을 좋은 가격에 편안히 구입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손가락과 전화기를 이용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Amazon.com에서 필요한 물건의 75% 이상을 쇼핑했던 내가 한국에 와서 티브이 홈쇼핑에 이렇듯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차피 둘 다 클릭, 클릭, 클릭으로 물건을 사는 점은 비슷하지 않나.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나는 홈쇼핑에서 파는 물건에 대해 열광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 눈과 귀를 사로잡은 것은 쇼 호스트들의 격양된 말투와 살짝쿵 격조 없고 다소 저렴한 단어들을 섞어 말하는  상품에 대한 묘사력이었던 듯싶다. 심지어 내 나라 언어인 한국말로 말이다.


나는 아마도.

높은 톤으로 빨리빨리 남이 끼어들 틈이 없도록 쉬지 않고 무언가 재미있게 한국말로 설명하는 것이 재미있고 쇼 중간중간 보여주는 신묘막측한 제품의 효능과 효과를 과장되게 연기하는 사람들 구경이 좋았던 것 같다.

저렇게 요란하게 떠들고 정신을 쏙 뺄 것 같은 티브이 안의 사람들과 내가 안전하게 분리되어 있고  깊은 밤 잠옷을 입고 혼자 키키득거리며 오롯이 '관찰' 할 수 있는 '홈쇼핑' 세상이 즐거웠다.




한국 온 지 3주가 지나면서 티브이 홈쇼핑에 대한 열정도 잦아들었다.

하지만 자정이 넘으면 '아이쿠 저건 맛있겠네' 싶은 걸 꼭 팔더라. 그리고 그때쯤 나는 배가 고프다.

매진 임박이라는 자막이 나를 압박하고 띨롱~띨롱~ 하는 주문 체결 효과음 같은 것으로 나를 흥분시키는 티브이 홈쇼핑. 게다가 짭짤하면서도 고소고소한 무언가가 먹고 싶은 내 위장.

자정도 훌쩍 넘은 깊은 밤.

이미 '굿나잇~' 하고 잠을 자러 들어간 식구의 방문을 콩콩콩 노크하고 이렇게 말해본다.

저기... 있잖아. 지금 홈쇼핑에 나오는 새우튀김이 너무 맛있어 보여서 그러는데 혹시 %% 홈쇼핑 회원이야? 회원이면 5% 싸게 해 준대. 나 저거 주문 좀 해주라
헤헤... (굽신굽신)


작가의 이전글 뒷좌석에 우는 아이가 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