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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밤 Mar 26. 2019

여보, 뭔가 막 키우고 싶다

이건 돈도 많이 안 들어


실은,

난 벌써 키우기 시작했다. 방금 전부터. 3월 25일 밤 9시 30분부터.

집안을 뒤져 밀가루, 다 먹고 씻어 놓았던 잼병(유리 소재), 물, 주방 저울을 늘어놓고 가뿐하게 시작했다.

이렇게.

그렇다. 나는 또 시작하고야 만 것이다


몇 년 전에도, 그보다 훨씬 앞 선 몇 년 전에도 나는 이걸 키우고, 죽이고, 살리고, 죽이고를 반복했다.

Sourdough Starter. 이걸 다시 키우기 시작했다. 방금 전부터. 또 말이다.

이 스타터가 있어야 내가 좋아하는 사워도우 브레드를 만들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깜빠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늦은 밤 덜거덕 거리면서 이것들을 탁자에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루라도 일찍 시작해야 얼른 키워서 하루라도 빨리 빵을 먹을 수 있겠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준비하는 내 손이 더 빨라졌다.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건 바로 이것 (photo by unsplash)


세상에 떠도는 레시피는 무궁무진하고 왕년엔 나도 이런저런 레시피를 따라 해 보고 별 별짓 다해봤지만

이제 나는 안다. 중요한 것은 이 스타터를 구성하는 재료의 비율이 아니라 이것을 얼마나 꾸준하게

안 죽이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튼튼하게 키워내는가 하는 끈기와 관심과 애정이라는 것을.

어머, 쓰고 보니 자식을 키우는 심정과도 일맥상통하네. 진짜 그렇네.


최소한 일주일은 수시로 들여다보고 중간중간 유리병 안에서 자라는 '미생물'이 먹을 밥(물과 신선한 밀가루)도 시간에 맞춰서 주어야 한다.

유리병 안에서 보글보글 뽀글뽀글 자라나는 이 '미생물'이 힘이 있고 튼튼해야

나중에 저런 빵을 구웠을 때 속에 구멍이 뻥뻥 뚫리면서 풍미가 좋은 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한번 녀석이 힘을 얻어 튼튼하게 크고 나면 초창기처럼 애지중지 안절부절 들여다보지 않아도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힘도 생긴다. 그땐 냉장고 안에서 스스로 견디면서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




우리 집 새로운 생명체. 튼튼하게 자라 다오.


봄이라서 그런가. 마음을 붙일 곳이 없어 허해서 그런가. 아니면 그냥 좀 늙어서 그런가.

뭔가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나에게 의존적인 존재들 (반려견/묘)은 부담 100배라서 엄두가 안 나고 혹시 그들이 아프거나 병들거나 죽거나! 했을 때에 나에게 미칠 정신적인 타격은 상상만 해도 스트레스가 밀려와서 그런 종류는 안될 것 같았다.

한편, 남편이 오매불망 바라고 키우고 싶어 하는  '식물/나무/분재' 들은 나의 시각에서 볼 때 '나무늘보, 굼벵이' 수준으로 느릿느릿 너무 답답하다. 깨어 있는건지 자고 있는건지 크고 있는건지 멈춘건지

도통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하다. (결과물이 빨리 도출되야 만족하는 스타일)

그러다가 번뜩 생각난 이 미생물!! 아마도 얘는 일주일-열 흘 이면 튼튼하게 자라나서 이후 나에게 맛있는 빵으로 환생을 할 것이다. 꿩도 먹고 알도 먹고.

덧붙여 자꾸만 강조하고 싶은 말.

여보 이거 키우는 데는 돈도 많이 안 들어. 밀가루 몇 숟가락이랑 물만 있으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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