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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밤 Mar 28. 2019

살림은 오장 같다

이런 속담이 있었네



한동안 다쳐서

내가 내 빨래를 안 하고 내 밥을 안 짓고 내 몸을 나 혼자서 움직이지 못하는 삶을 살았지만

지금은 다시 몸을 회복해서 이제 내 일은 내가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완벽하게 나은 몸이 아니라 당장 돈을 버는 전선(?)으로 나가기엔 무리가 있고

그렇다고 몇 달 전처럼 중환자인 양 두 다리 뻗치고 앉아만 있을 수도 없는 일.

그래서 생각했다. 그래, 살림을 하자! 제대로.


결혼 후 이렇다 할 뚜렷한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는 나는 살림하는 여자' 로서의 삶이 익숙한 편이다.

물론 처음부터 익숙한 것은 아니었고(누구나 그렇겠지만). 처음엔 한심했다.

신혼여행이 끝난 후 남편과 단둘이 살게 된 '진짜 결혼생활 첫날' 나의 첫 살림은

친구 몇 명이 돈을 모아 결혼 선물로 준 전기밥솥을 포장 박스에서 꺼낸 후 비닐을 뜯고 박스 아래쪽에 조금 구겨진 채 깔려있던 '사용설명서'를 펼쳐 들고 사용방법을 2번 정독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밥솥 설명서를 읽고 있던 나를 보고 어이없어하던 남편의 젊은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지금 뭐해? 응, 밥을 어떻게 하는지 읽어 보려고
밥을 어떻게 하는지 몰라? 응, 몰라요.
밥 안 해 봤어? 응, 안 해봤어

비록 이렇게 나의 살림은 '미약'하게 시작되었지만 세월이 흘러 아이를 낳고 키우고 이젠 그 아이도 다 커서 집에서 3시간이나 떨어진 다른 도시에서 살 게 된 이 시점의 내 살림 스킬은 '창대' 하진 않아도 내 나이 또래 다른 여자들만큼은 된다고 생각한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그런데 익숙했던 내 살림에서 벗어나 있다가 다시 내 '살림'으로 돌아왔는데

모든 게 조금씩 어색하고 이상한 기분이 든다. 그래, 살림을 하자!라고 결심도 했는데 영 이상하다.

마땅히 이건 여기에 있어야 할 물건들이 여기에 없고 조금씩 다른 곳에 흩어져 있다.

이것을 만지다가 저것을 집으려면 몸을 돌려 손을 여기로 뻗치면 되는데 내가 찾는 그것이 거기에 없다.

아예 남의 집에 온 것처럼 완전히 아무것도 익숙하지 않은 상태라면 너무 생소하니까 그러려니 할 것도 같은데

이건 분명히 내 집에서 나에게 익숙했던 물건들과 행동들인데도 조금씩 틀어져 있고 바뀐 것들이

무척이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살짝 비틀어서 낸 문제들을 풀기가 더 어려운 것처럼 내 살림살이들이 그랬다.

부엌살림이면 살림, 옷가지들이면 옷가지, 책꽂이 책들이면 책, 서랍 안은 혼란했다.

어떤 물건이 필요할 때 그것을 한방에 찾아내지 못하고 두서너 곳을 기웃거리고 헤매는 내가 낯설고 피곤했다.

꼭 명절에 시댁에 간 새댁이 '어머님 과도는 어디 있어요, 어머님 큰 쟁반은 어디 있어요, 어머님, 깨소금은 어디 있어요, 어머님... 어머님..' 이러는 것처럼.


내가 싫어하는 살림 종목- 설거지. 진짜 싫다.


그래서

일이 커졌다.

다시 새로 이삿짐을 풀었다고 생각하고 새로 정리하기로. 그래야 다시 내 손에 살림이 달라붙을 것 같았다.

사부작사부작 조금씩 섹션을 나눠서 정리를 하다 보니 이젠 거의 끝이 났고 힘은 들었지만 다시금 내 살림들이

내 머릿속에 쏙 들어오게 되어 길을 잃고 헤매는 느낌이 없어졌다.

덕분에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보잘것없는 집이지만 뭔가 빤짝빤짝해지고 생기가 도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한번 정돈해 놓으면 다시 몸이 회복되어 밖에서 일을 하고 집안에서 살림하는 시간이 줄어든다고 해도

길을 잃은 기분은 들지 않을 것이다.



살림은 오장 같다.

이런 속담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사람 뱃속의 오장이 다 제각각 기능을 잘해야 건강하게 살 수 있듯이 살림살이 하나하나도 서로 손이 맞아떨어져야 함을 비유로 말하는 것이라 한다.


나도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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